劉基俊
基俊1894. 5. 2 ~ 1964. 7.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 · 대한적십자회
- · 상해한인구락부
- · 시사책진회
- · 동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 · 동우회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4년 5월 2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대동강면(大同江面) 현교리(絃橋里)에서 부친 유희원(劉禧源)과 박성반(朴聖磐)의 2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본명은 유경덕(劉景德)이고,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유기준(劉基峻)을 사용하였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강본기준(江本基俊)을 썼다. 부인 최명실(崔明實)과 슬하에 세자녀를 두었다. 고향 대동강면에서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하였다. 1910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15년 3월 졸업하고 상경하여 연희전문학교(延熹專門學校)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연희전문학교 학생대표로 참여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추적을 피해 1919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가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 조직망을 구축할 때 평안남도 특파원에 임명되어 8월에 국내로 밀파되었다.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알리고 정부 정책을 선전하며 국내 정세를 파악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던 중 평양 기성(箕城)병원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조사를 받던 중 탈출에 성공해 1920년 1월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의 권유로 국무원 서기에 임명되었다. 1921년 흥사단(興士團) 원동임시위원부(遠東臨時委員部)에 가입해 14반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단원 번호는 141번이다. 1921년 6월 중국에 귀화해 유기준으로 개명하였다. 상하이 프랑스조계 포석로(蒲石路) 14번지에서 손정도(孫貞道)·안정근(安定根) 등과 함께 거주하며, 안창호(安昌浩)의 비서 일을 맡아 보좌하였다. 1921년 11월 대한적십자회 정기총회에서 안창호가 회장에 선출되었을 당시 대한적십자총회 상의원(常議員)에 보선되었다. 1921년 12월에는 상해한인구락부(上海韓人俱樂部) 조직을 발기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의사를 통합하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추진”을 표방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12월 난징(南京) 금릉대학(金陵大學)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난징 흥사단 단우회를 이끌었다. 1922년 6월 귀국하여 1923년 4월 연희전문학교의 사무원으로 채용되어 1936년까지 근무하였다. 이후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봉산면(鳳山面) 망일동(望日洞) 28번지에서 광산업에 종사하였다. 1933년 2월 11일에 동우회 이사회 심사부장에 선임되었다. 1937년 7월 21일 이른바 ‘동우회사건’으로 붙잡혔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280일 본형 산입)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상고하여 1941년 2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되어 풀려날 때까지 미결수로 옥고를 겪었다. 1945년 광복 후 흥사단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64년 7월 6일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영결식에서 주요한(朱耀翰)은 추도사를 통해 “유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락을 취하는 등 광복운동에 일생을 바쳤다”고 추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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