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子明
子明1894. 1. 13 ~ 1985. 4. 1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청년외교단
- · 신한청년당
- · 의열단
- · 다물단
- ·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 · 남화한인청년연맹
- · 흑색공포단
- · 조선혁명자연맹
- · 조선민족전선연맹
- · 중한문화협회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 · 김달하 처단 사건
- · 나석주의거
- · 육삼정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4년 1월 13일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이안면(利安面) 삼주리(三洲里, 현 충주시 대소원면 영평리)에서 아버지 유종근(柳種根)과 어머니 전의이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아명은 흥갑(興甲)·흥식(興湜)·(興植), 호는 우근(友槿)이다. 이명으로 유계청(柳季淸)·유흥근(柳興根)·유흥준(柳興俊) 등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1895년 궁내부 주사에 임명되었고, 평양부 주사로도 근무하였다. 그러나 단발령이 내려지자 낙향하여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보냈다. 부친은 비교적 부농에 속하였고, 백부인 유동근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최고 교육기관인 수원농림학교에서 수학하고 부모와 처자를 남겨두고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경제적 기반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충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농림학교에 진학하였다. 1916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곧 충주공립간이농업학교 교원으로 발령받았다. 학생들을 데리고 인근 유적지를 찾아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망국의 비참함을 들려주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간이농업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만세운동을 벌이려는 계획을 준비하였다. 계획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자 서울로 피신하여 고향 친구인 이병철(李秉澈)을 만나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에 참가하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 지침으로 표방하였는데, 조용주·연병호(延秉昊)와 함께 중앙부 외교원으로 활동하였다. 후일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단을 지원하기 위해 이병철(李秉撤)·조용주 등과 함께 조직하였다고 회고하였다. 1919년 6월 조용주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2월 일시 귀국할 때까지 상하이(上海)에 머물며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기 회기(1919. 8. 18~9. 17) 때 충청도의원에 선임되어 의정원의 문건 보관과 회의 기록 업무 등을 맡았다. 또한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입하여 비서로 활동하였다. 안창호(安昌浩)의 군중 연설과 신채호(申采浩)의 역사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신채호의 숙소를 자주 방문하여 친한 관계가 되었다. 또 수원농림학교 동기의 형인 강태동(姜泰東)의 소개로 이후 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김한(金翰)을 만났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연통제 관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귀국하여 약 1년 4개월간 머물렀다. 서울에서 김한과 함께 생활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안확(安廓)과는 민족개조(民族改造)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고, 이를 『동아일보』에 「내적개조론의 검토」라는 제목으로 연재(1920 4. 28~30)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다양한 서적을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는데, 이후 대표적인 아나키즘 이론가로 성장하였다. 1921년 4월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신채호·이회영(李會榮) 등과 교류하였다. 그 해 겨울 텐진(天津)으로 이동하였고, 1922년 여름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통신과 문자 선전의 책임을 맡았다. 1922년 3월 이른바 ‘황포탄 의거’가 실패하면서 김원봉은 의열단의 투쟁 방향을 새롭게 정립하는 선언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 때 신채호를 선언문 집필자로 추천하였고, 김원봉은 신채호를 상하이로 초청하였다. 1개월간 신채호와 함께 기숙하며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의 집필을 거들었다. 1922년 4월 베이징으로 가서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고,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24년 4월 말에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현섭(鄭賢燮)·백정기(白貞基)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심한 감시와 자금난으로 인해 조직된 지 5개월 만에 해산하고 말았다. 1927년 9월 베이징에서 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無政府主義者東邦聯盟)에 참여하였다. 이때 신채호에게 타이완(臺灣) 아나키스트 린빙원(林炳文)과 이필현(李弼鉉)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듬해 신채호는 독립운동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이들과 ‘국제위체 위조사건’을 결행하였다. 1929년 봄 난징(南京)으로 와서, 한푸옌(韓復炎)열사기념 합작농장에서 근무하였고, 취안저우(泉州) 리밍중학교(黎明中學校)에서 일시 교편을 잡았다. 난징에 머문 시기는 이후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1930년 1월 상하이 리다학원(立達學園) 농촌교육과에서 농업과 일본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가와 농학자의 길을 병행하였다. 농장과 교육 현장의 경험은 해방 후 중국에서 농학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 리다학원에 재직하던 시기인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아나키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를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의 표면단체’라고 표현하였다. 이회영의 추천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장 겸 대외책임자로 추대되어, 1932년 12월 이회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연충렬과 이규서를 처단하였다. 1933년 3월 17일 흑색공포단의 백정기·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 의사가 시도한 ‘육삼정(六三亭) 의거’를 기획하고 무기 구입 등을 주선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으로 개칭하고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조선민족해방운동자연맹(朝鮮民族解放運動者聯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 세 단체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여 항일 대오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난징이 함락 위기에 빠지자 한커우(漢口)로 피난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창립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당시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과 각종 선전물의 출판 책임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직접 쓴 『조선민족전선』의 창간사에서 한·중 양 민족이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립시켜야 하는 공통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중국의 대일항전이 실패한다면 조선 민족의 해방은 기대할 수 없으며, 조선 민족이 중국 민족의 최후 승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며, 한·중연대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혁명 진영은 계급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전 민족이 단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결성 시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의 중문 편집위원을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한·중 연대와 공동 항일을 표방한 중국 관내지역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인 군사조직이었다. 1939년 초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고, 8월 27일 치장(綦江)에서 열린 7당 통일회의에 참가하였다. 김구(金九)의 부탁으로 치장에 임시정부 ‘신촌(新村)’을 설계하기도 하였다. 충칭에 머물며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운동에 노력하던 중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0월 21일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1월 3일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 수정위원으로 선임되어 한국광복군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회복하기에 노력하였다. 11월 28일 약헌(約憲) 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0월 11일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창립 시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었다. 1943년 3월 4일 학무부 차장에 선임되었으나, 5월 4일 의원면직하고 구이린(桂林)으로 돌아가 농장 운영에 종사하였다. 또한 중국인 아나키스트이자 저명한 작가인 바진(巴金)을 비롯한 많은 중국인 친구들과 교유하였다. 1945년 푸젠성(福建省)에서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중국인 부인과 자녀 문제로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1946년 타이완(臺灣)으로 가서 타이베이시(臺北市) 농림처 기술실 책임자가 되어 합작 농장을 추진하였다. 이듬해에는 농림청 기술실 주임과 『타이완농림(臺灣農林)』 편집 담당 업무를 맡았다. 1950년 6월 귀국하기 위해 홍콩(香港)에 당도하였으나, 공교롭게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귀국을 포기하였다. 후난성(湖南省) 부성장 정싱링(程星齡)의 도움으로 창사(長沙)에 있는 후난대학(湖南大學) 교수로 부임하며 농학자의 길을 걸었다. 이후 중국 벼농사의 기원을 밝히는 업적을 이뤘고, 포도와 장미 등 원예 부문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겨 중국 현대 농학자로서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1957년에는 북한으로부터 귀국 통지를 받고 귀국 준비를 하였으나, 중국 고등교육부의 요청으로 중국 정부가 승인을 취소하는 바람에 또 한 차례의 귀국이 좌절되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으며, 197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남북한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1983년에는 제자 등이 후난농학원(湖南農學院)에서 탄신 90세 축하연을 열어주었다. 1985년 창사에서 92세로 별세하여 웨루산(岳麓山)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고국에 묻히기를 바랐던 유언에 따라 2002년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6년 중국 호남성 과학기술협회에서 ‘호남과기지성(湖南科技之星)’으로 선정하였고, 2005년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주관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나의 회억』을 비롯하여 원예 및 농학과 관련한 다수의 논저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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