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손
安秉孫1874. 1. 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7)
관련 사건
- ·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 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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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7) 1874년 1월 4일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 영충면(永忠面) 영달동(永達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그해 4월 초순 영충면 북창평(北蒼坪)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국내 종교계 인사들과 민족지도자, 그리고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한국 독립에 대한 기대감으로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나아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이끌기 위해서 전국 각 지역으로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시작해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3월 6일 성진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는 것을 시작으로 함경북도에는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3월 6일부터 회령(會寧)·성진(城津)·길주(吉州) 등에서 만세시위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에 비해서 온성군에서는 3월 19일을 전후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기 시작하였다. 3월 19일 온성군 온성면(穩城面) 온성읍내에 독립선언서가 부착되었으며, 3월 20일 헌병대는 최성엄(崔成嚴)의 집에서 조선총독유고문의 뒷면에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1매를 압수하였다. 영충면 북창평동에 거주하는 전창우(全昌禹)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3월 30일 전창우는 영충면 회덕동(懷德洞)에 사는 김창욱(金昌旭)에게 본인이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으며, 전창우와 김창욱은 동지를 규합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였다. 전창우와 함께 4월 4일 영충면 회덕동 회동교(懷洞橋)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김창욱과 전창우는 4월 4일 만세시위에 사용할 대형 태극기 1기와 소형 태극기 35기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전창우는 박상원(朴尙元)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으며, 김창욱은 이근수(李根秀)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제안하였다. 4월 4일 오전 10시 회동교 부근에서 전창우, 김창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김창욱은 시위대를 향해서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으며, 연설이 끝나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소형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전창우·김창욱과 함께 천도교도와 주민으로 구성된 150여 명의 시위대를 인솔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경유해서 북창평 시장으로 나아갔으며, 오전 11시 30분 무렵에는 영충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면사무소에서 지척에 위치한 북창평헌병주재소 소속 헌병들이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시위대가 헌병대의 명령을 무시하고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막대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다. 헌병대의 발포로 최기철(崔基哲)을 비롯한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고, 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시위대는 헌병대의 발포를 피해서 잠시 해산하였으나, 다시 북창평시장으로 집결하였다. 그 사이에 경원군에서 수비대가 영충면에 도착하였다. 영충면 헌병대는 수비대와 함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시위대는 끈질기게 만세시위를 전개했으며 11시에 이르러야 해산하였다. 영충면 북창평 장터 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일제 군경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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