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국
安奉國1894. 1. 2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9)
관련 사건
- · 평북 철산면 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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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9) 1894년 1월 21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철산면(鐵山面) 동부동(東部洞)에서 태어났다. 철산의 기독교계 인물로서 철산면 장터 만세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하는 데 참여하였다. 철산군의 읍내 장터 시위가 계획된 것은 이곳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명흥학교의 교사 안태영(安泰英)이 3월 1일에 선천군(宣川郡)에 갔다가,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것에서 시작되었다. 안태영은 그 날 밤 명흥학교 교직원들에게 자신이 선천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만세시위 상황을 전달했으며, 그들은 철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지역의 기독교계, 천도교계, 일반 사회인 측에서 각각 대표자를 뽑아서 준비하기로 했는데, 첫 번째 회의는 3월 3일 밤 동부동(東部洞) 유봉영(劉鳳榮)의 집에서 열렸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네 차례 정도 회합을 가지고 시위 준비 방법과 실무 사항들을 논의하였는데, 기독교계 인사로서 회의에 참석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 날짜는 읍내 장날에 맞추어 3월 7일로 결정되었으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선언식은 동부동에 있는 기독교 예배당에서 하기로 하고, 예배당의 종이 울리면 그것을 신호로 모이기로 하였다. 특히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실무 과정에 관여를 많이 하여, 태극기의 제작을 기독교 측에서 담당하기로 하였을 때 심치경(沈致璟)과 함께 태극기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또, 독립선언서의 등사는 천도교 측에서 담당하기로 하였지만, 이재근(李載根)의 집에서 선언서를 등사할 때 찾아가서 조력하여 돕기도 하였으며, 시위 전날 안태영으로부터 군중에 배부할 200매 이상의 선언서를 전달받기도 하였다. 예정대로 3월 7일 정오에 동부동의 기독교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철산의 기독교인, 천도교인, 일반 주민 등 1천여 명이 예배당 안에 모였다. 주최 측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제창한 후, 가져온 태극기와 선언서를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함께 시가행진에 나섰다. 거리에 있던 철산 군민들도 만세를 부르며 동조하였으며, 때마침 장터에 모여 있던 군민들이 시위에 합류하면서 그 규모는 5천여 명 가량으로 불어났다. 이 때 일제 경찰의 지원 요청에 응해서 철산에 증파되어 있었던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가 시위대의 뒤를 좇으며 해산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우편국 앞에서 시위대와 우편국의 일본인 직원들과 충돌이 생기자 시위대를 향해 폭력적인 진압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서 앞의 좁은 골목에 몰린 시위대를 향해서 철도원호대가 실탄을 발사하고 총검을 휘두르면서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7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50여 명이 크게 다치고서야 상황은 종료되었다. 4월 8일부터 일제 경찰이 주도자와 시위 지휘자, 선언서와 태극기 제작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시위 기획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곧 붙잡혔다. 9명의 시위 주도자와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1년 6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제1심과 제2심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출옥 이후에도 지역에서 기독교계를 기반으로 청년회 등에 참여하며 지역 사회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22년 8월 1일 철산 청년회의 제2회 총회가 열렸을 때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였고, 1925년 4월 철산에서 군청과 경찰청을 이전하는 문제로 철산군 시민대회가 열렸을 때는 주민들의 항의 의사를 전달할 시민 대표 중 하나로 뽑히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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