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춘
安相春1899. 6. 4 ~ 1950. 5.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서산군 대호지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6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대호지면) 사성리(沙城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서산군 대호지면 천의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대호지면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의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유생들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세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서산 지역에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 열기가 고조되었다. 서산군 대호지면에서는 면장 이인정(李寅正)을 비롯하여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완(姜太玩)·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뒤 대호지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천의장터 장날인 4월 4일로 결정하고, 사전에 면내의 각 리(里)별로 연락망을 구성하였다. 다수의 주민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을 각 마을에 보내 도로 보수를 위해 한집에 한명씩 4월 4일 면사무소로 모이라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4월 4일 아침 송봉운(宋逢云) 등과 함께 조금리(調琴里)에 위치한 대호지면사무소로 갔다. 아직 만세시위에 대해 모르는 다른 주민들은 도로 보수를 위한 연장을 지참하고 면사무소 앞으로 모였다. 주민들이 모이자 면장 이인정은 오늘의 목적은 도로 보수가 아니라 만세운동이니 동참하라고 연설하였다. 이후 선두에 대형 태극기가 등장하자,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공감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 송재만의 지휘에 따라 시위 대열을 형성하고, 대열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천의장터로 행진하였다. 천의장터로 향하는 길목마다 만세시위대가 외치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듣고 정미면의 주민들까지 참여하여 만세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과 함께 시장 곳곳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천의장터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천의주재소의 경찰력만으로는 만세 시위의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당진경찰서의 경찰력을 급파하였다. 이들이 천의장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만세 시위가 마무리되어 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은 주변의 음식점으로 흩어져 식사 중이었다. 이 중 한 무리의 소지품 중에서 대형 태극기를 발견한 당진경찰서의 순사들은 그것을 빼앗으려 했으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하여 만세시위대에 총을 쏘았다. 이로 인해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천의주재소로 달려갔다. 송재만의 지휘에 따라 송봉운·김길성(金吉成)·김부복(金夫卜)·김장안(金長安)·김팔윤(金八允)·남용우(南容祐)·김양칠(金良七)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 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을 구타하고, 돌을 던져 시설과 기물을 부수는 등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날의 만세 시위 이후 대호지면으로 출동한 홍성헌병수비대의 만세운동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체포 과정에서 붙잡혀 서산경찰서에 갇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천의주재소 습격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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