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섭
安成燮1880. 10. 17 ~ 1944. 3.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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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10월 17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지사면(只沙面) 영천리(寧川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桐花里)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유생(儒生) 박정주(朴政柱)는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생각을 가졌다. 1919년 3월 19일 오후 3시, 박정주는 마을 주민 김경수(金京洙)의 집 동쪽 밭에서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가지고 동화리 장터로 갔다. 박정주는 태극기를 장대 2개에 꽃아 주민 정봉수(丁奉洙)·정호현(丁豪鉉)에게 각자 나누어 들게 한 후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부르면서 장터 군중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이 모습을 지켜본 동화장터에 온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에 참여하였는데, 그 수가 약 2백 명에 이르렀다. 만세운동 참여자가 급속히 늘어가자 동화헌병주재소 헌병보조원 장재권(張在權)은 시위 주동자들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지만, 이들은 헌병보조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이끌었다. 그러자 주재소 헌병상등병 오카지(岡地豊吉)가 장재권과 합류해 박정주를 비롯하여 시위대의 선두에 섰던 시위 주도자 3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시위 주동자들이 동화헌병주재소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2백 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헌병주재소 앞에서 구금된 시위 주도자의 석방을 촉구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헌병주재소에 구금당한 시위 주도자들을 석방시키지 않는다면 무력을 사용하여 이들을 강제로 구출해 내겠다고 헌병들을 위협하였다. 같은 날 오후 5시경, 성난 시위대의 기세에 압도당한 헌병 오카지는 결국 체포한 시위 주도자들을 헌병주재소에서 모두 석방하였다. 헌병주재소에 모여 있다가 시위 주도자들이 풀려나자 크게 기뻐하며 풀려난 시위 주동자들을 끌어안고 함께 산서면사무소 앞으로 행진하였다. 면사무소 앞에 도착하여 시위 주도자 박정주를 비롯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여러 번 부른 후, 박정주의 대한독립을 축하하는 연설을 들은 다음 스스로 해산하였다. 만세시위가 끝난 후,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1919년 4월 1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러자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 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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