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윤
安聖允1892. 6. 19 ~ 1926. 7.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성진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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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92년 6월 19일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시) 연지동(蓮池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성진군에서 만세시위를 이끌 당시 안성인(安聖仁)이라는 이름으로 보신학교(普信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7년 9월경부터 보신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는 캐나다 장로회 소속의 기독교 학교로서, 성진군 만세시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신학교가 성진군의 만세시위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시위 준비와 시가 행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보신학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던 욱정(旭町)교회와 그레이슨(Robert Grierson, 具禮善) 목사가 시위 계획을 적극 후원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919년 3월 7일 목사 강학린(姜鶴麟), 보신여학교 교사 이규용(李奎鎔) 등 지역의 기독교계 지도자들 10여 명과 그레이슨 목사의 집에서 비밀회합을 열어 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같은 날 김상필(金相弼)·이효근(李孝根)·서유진(徐有珍) 등 욱정 교회 청년들은 보신학교에서 등사판을 가져와 그레이슨 목사 자택 내의 고용인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등사하였다. 3월 9일에는 예배를 보기 위해 욱정교회에 모인 신도들 앞에서 그레이슨 목사가 독립운동을 암시하는 설교를 하는 등 만세시위가 계획적으로 준비되었다. 만세시위를 약속한 한 3월 10일 오전 11시, 보신학교 학생 45명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곧이어 학생들과 함께 학교 밖으로 나와 욱정교회에서 설립한 제동병원(濟東病院) 앞에 모여 나팔을 불어 군중을 모으자 250여 명이 모여들었다. 함께 시위를 준비한 교사 이규용, 제동병원 직원 김원배(金元培) 등 다수의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도들이 동참했고, 선언문 낭독과 만세 제창 이후에 시가 행진에 나섰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에게도 ‘독립만세’를 권유하여 시위 규모를 늘려가면서 일본인 거주지인 본정(本町)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본정 식산은행지점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해산시키려는 성진경찰서의 경찰대를 맞닥뜨렸다. 억지로 태극기를 탈취하려는 등 강압적인 일제 경찰의 태도에 분노한 시위대가 기와 등을 던져 투석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위 군중이 본정을 지나 성진군청까지 행진하자 성진군수가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해산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제 경찰들이 군중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는 등 폭력적인 위협을 가해 오후 4시 30분경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만세시위의 열기에 놀란 성진군이 재향군인, 소방조원 등을 동원하여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함경북도장관은 보병 제37여단 나남 부대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 나남 부대는 3월 10일 오후 12시 기병 장교와 하사 등 14명을 육로로, 3월 12일 아침에 보병 장교 및 병졸 등 18명을 해로를 통해 성진으로 보냈다. 성진군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강학린·이규용 등의 기독교 인사 14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28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9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자신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반한 의사의 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징역 6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여 그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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