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경동
禹涇東1876. 9. 21 ~ 1960. 1. 2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파리장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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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5) 1876년 9월 21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월배면(月背面) 상인리(上仁里,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의 양반 가문에서 아버지 우해익(禹海益)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시식(是湜)이고, 한자가 다른 경동(經東)이라는 이명도 있다.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영향 아래 한학을 수학하고, 달성의 유력한 유림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래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내외에 천명한 문서가 독립선언서였다. 독립선언서는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여기에 유교계의 인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유림에게 매우 큰 충격이자, 수치였다. 유교는 조선의 건국 이래 국가의 정치적, 사상적 지주였고,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일상 생활의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유림은 국내의 만세운동은 주도하지 못했으나,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천명하는 활동만은 책임지고 주도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의지를 직접 전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청원운동의 주도 세력은 전국의 유림 중에서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이었다. 곽종석은 영남지역에서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맥을 중심으로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문하의 제자들을 영남 지역 곳곳으로 파견하여 독립청원운동에 유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경술국치 이래 주변의 뜻있는 유림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며, 한국의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였다. 1919년 3월 1일 이래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상황을 파악하며 정세의 변화를 살피던 중, 스승 곽종석으로부터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석하(曺錫河)·권상문(權相文)·우성동(禹成東)·우찬기(禹瓚基)·우승기(禹升基)·우하교(禹夏敎) 등과 함께 유림의 1차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독립청원서」, 세칭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다. 유림은 파리강화회의에 직접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자 하여 김창숙(金昌淑)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은 중국의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후 파리로 가지 못하고 「독립청원서」를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이미 파리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우송하였다. 그런데 경북 상주(尙州)에서 파리장서에 서명한 송회근(宋晦根)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중 1919년 4월 12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유림의 독립청원이 발각되었다. 이에 유림 대표들에 대한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체포가 전개되어 달성 지역의 조석하·우성동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하지만 일제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유림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최대한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하였다. 그 결과 이른바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1919년 5월 16일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 처분되어 일제의 감옥에서 3개월 간 옥고를 겪은 뒤,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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