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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명

禹斗命

1878. 8. 26 ~ 1947.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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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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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78년 8월 26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목면(木面) 화양리(華陽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청양군 정산면(定山面) 정산시장(定山市場)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에서는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 등 유림의 주도로 시작된 1차 만세시위와 권흥규(權興圭)의 사망이 계기가 되어 그의 시신 운구과정에서 목면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2차 만세시위의 2단계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4월 5일 오후 홍범섭·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은 장날이었던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으로 나가 주민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직후 일제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범섭 등 30여 명을 붙잡아서 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장날 시장에 나왔다가 폭압적인 일제 헌병의 만세시위 탄압에 분노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이에 만세위대는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연행된 홍범섭 등을 대신하여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가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였다. 그의 지휘를 받아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제 헌병의 발포로 권흥규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다음날인 4월 6일 아침 사망한 권흥규의 시신 운구에 참여하였다. 권흥규의 친인척을 비롯하여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부터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였다. 운구행렬의 선두에는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이 있었다. 권흥규의 운구가 지나가는 길목의 마을마다 주민들은 노제를 올리고 통곡하며 운구행렬에 동참하면서 행렬의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었고, 어느 순간 운구행렬 속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운구행렬은 그 자체로 만세시위대로 전환되었다. 이에 운구에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안심리를 향해 나아갔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일제는 공주(公州)의 헌병대를 안심리 방면으로 급파했는데, 이들은 운구행렬과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발포하였다. 이로 인해 이날도 권흥규의 조카딸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전날에 이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직후 일제 헌병에 붙잡혔다.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권흥규의 시신 운구와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태(笞) 90도(度)의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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