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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환

禹聖煥

1880. 12. 30 ~ 1947.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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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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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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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6) 188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해남리(海南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성환(聖還)을 썼으며,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5일 정산시장에서 시작되었다. 정산면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했는데,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直員) 권흥규(權興圭)의 사망을 계기로 다음날인 4월 6일 목면(木面)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홍범섭 등은 4월 5일 오후 3시부터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에서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장날의 만세시위를 경계하고 있던 일제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시위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평화적인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 헌병의 폭력적 탄압을 목격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700여 명으로 확대된 만세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대의 위세에 놀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권흥규가 사망하였고,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갔다.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운구행렬을 조직하였다. 운구의 선두에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앞세웠다. 고인의 자택이 소재한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에 많은 만장(輓丈)이 줄을 이었고, 운구가 지나가는 각 마을에서도 상여를 대고, 곳곳에서 노제를 올려 통곡하며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지곡리(池谷里)를 경유할 즈음 운구행렬의 규모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대한독립만세’의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했다. 운구행렬 자체가 만세시위대였고, 만세시위대가 운구행렬이었다. 이에 일제는 사망한 권흥규의 운구행렬 마저도 해산시키기 위해 정산의 헌병파견대 외에 공주(公州)의 헌병들까지 동원하여 목면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을 비롯해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 등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비극이 전날에 이어 벌어졌다. 이날의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했다는 혐의로 일제 헌병에 붙잡혀서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4일의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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