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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安炳瓚

1854. 5. 3 ~ 1929.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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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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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주(洪州)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홍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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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홍주의병
  • · 파리장서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54년 5월 3일 충청남도 홍주군(洪州郡) 화성면(化城面; 현 청양군 화성면) 신정리(新亭里)에서 아버지 안창식(安昌植)과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 尹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이다. 조부인 안용(安溶)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10여 세에 이미 시·서·예에 뛰어났다고 한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절의정신에 철저하였으며 성품 또한 강직하였다. 1892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과거시험장의 문란함 등 과거의 부패상을 목도하고 과거장을 뛰쳐나와, 이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894년부터는 홍주향교의 전교(典校)로 향약을 베풀고 강회를 열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같은 해 동학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자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를 도와 동학세력을 물리쳐 향리에서 주자학 질서를 지키고자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사건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 등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1895년 (음)11월 29일 채광묵(蔡光黙)과 안창식(安昌植)이 모집해 놓은 민병 180명을 거느리고 홍주로 들어갔다. 김복한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李勝宇)를 설복시켜 의병에 합류시켰다. 1895년 (음)12월 3일 김복한을 총수로 추대하고 홍주 관하 17군과 본부 27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지휘부를 편성하고 소모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김복한·홍건(洪楗)·이상린(李相麟)과 함께 성안에 창의소를 설치하였지만 창의소 설치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김복한·이설·홍건·임한주(林翰周)·이상린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 이날 저녁 구차하게 살아 뭇 소인들로부터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머리를 온전히 하여 죽는 것이 낫다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을 기도하였다. 옥중에서 임승주(林承周)가 주는 미음을 먹었지만, 상처 난 구멍으로 새어나올 정도였으며 구멍을 통하여 잔기침도 나왔다. 임승주의 극진한 간호로 다음 날 새벽에 깨어나 문종이를 찢어서 목에서 난 피로 혈시(血詩)를 지어 이승우에게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며 1906년 초부터 의병봉기를 추진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定山)에 거주하고 있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1906년 3월 의병을 모아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이때 행군사마의 직을 맡았다. 통문을 작성하여 인근 사민의 의병참여를 호소하였는데, “일본의 노예가 되고 고기밥이 될 것을 막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음을 밝혔다. 1906년 3월 15일 홍주 의병부대는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으로 점령에 실패하였다. 다음날 의병부대는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군제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公州)를 공격하기로 하고 화성의 합천(合川)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의병 봉기의 소식을 듣고 공주부 일제 헌병대가 급파되어 홍주군 관군과 함께 오후 10시경 합천 인근에 들어와 잠복하였다. 3월 17일 오전 5시 이들의 공격을 받아 의병부대가 해산되고 말았는데, 이때 박창로(朴昌魯) 등 의병 2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공주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이남규(李南珪)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석방되자마자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의 참모사로서 홍주의병에 다시 참여하였다. 동생인 안병림(安炳琳)도 돌격장으로 참전하였다. 1906년 5월 20일 홍주의병부대는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5월 30일 서울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의 포위공격으로 성은 함락되고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성을 빠져나와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11월 20일 예산(禮山)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 일제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박윤식(朴潤植)·이석락(李錫樂)·최선재(崔璇在)·윤자홍(尹滋洪) 등 수십 명과 함께 공주감옥에 감금되었다. 공주감옥에서 풀려난 후에도 박창로와 함께 정산(定山)의 칠갑산(七甲山) 쪽으로 들어가 항쟁을 지속하였다. 1907년 12월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는데, 이때의 일제 보고서에 의하면 의병 약 3백명이 있었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나 1919년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복한과 함께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고 장서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 1919년 6월 13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붙잡혀 공주감옥에 갇혔다. 6월 24일 대구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대구감옥에서 7월 29일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7월 31일 항소를 포기하고 그날로 풀려났다. 이후 세상과 두절하면서도 향리에서 자제교육에 힘쓰다가 1929년 6월 2일 세상을 떠났다. 『동아일보』는 1929년 6월 7일자에 장례식을 찾은 조문객이 5백여 명이었으며, 만장이 수백여 장에 달할 정도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는 기사를 작성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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