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纘熙
纘熙1884. 8. 8 ~ 1930.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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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2010)
관련 사건
- · 3.13만세운동
- · 태평양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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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2010) 1884년 8월 8일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합탄면(合灘面) 매후리(梅後里) 대동(垈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춘계(春溪)이다. 이명으로는 한자가 다른 유찬희(劉讚凞·柳讚凞·劉贊凞·柳贊凞·柳瓚熙·柳燦熙·柳讚熙·柳粲凞)를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유헌보(柳憲甫)이고, 부인은 이안나(李安羅)이다. 자녀는 장녀 유신덕(柳信德), 장남 유기석(柳基石), 차남 유기문(柳基文), 차녀 유낙순(柳樂順)이 있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수학하다가 1900년 서울로 유학하여 배재학당(培材學堂)을 다녔다. 실업가로 대동상회(大東商會)와 무악흥업회사를 운영하였다. 교육사업도 전개하여 태광학교(太光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했고 항일운동가 권사용(權思容)이 설립한 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1919년 2월에는 간도(間島)에서 영국인 목사를 교장으로 하는 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1911년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에서 교회를 운영하였다. 간도 이주 이후 국자가교회(局子街敎會)에서 장로로 활동했고 이후 남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1907년 간도 용정(龍井)에서 김약연(金躍淵)·김영학(金永學)·구춘선(具春先)·강백규(姜百奎)·마진(馬晋)과 함께 연변교민회(延邊僑民會)를 조직하였다. 연변교민회는 한인의 자치를 위해 조직하였는데 간민교육회(懇民敎育會)의 전신인 단체이다. 1915년 1월 일제가 중국에 대한 이권을 일방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중국 정부에 불평등한 요구 사항인 「21개조 요구」를 제출하였다. 이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받아들이면서 중국 정세는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과 연대하여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국자가에서 장종휘(張宗輝)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만국개량회(萬國改良會)에 이동휘(李東輝)·정재면(鄭載冕)·권사용·유기연(柳基淵)·하희옥(河熙玉)·정안립(鄭安立)·최빈(崔斌)·유흥윤(柳興允)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1915년 3월 27일 국자가 연길여관(延吉旅館)에서 박동원(朴東源)·김옥성(金玉成)·권사용·김하석(金夏錫)·방진성(方進成)·김태율(金泰律)·신형균(申亨均)·유흥원(兪興源)·김영태(金永台)·전일(全一)·조영하(趙永夏)·김정윤(金正潤)·옥동희(玉東喜)·신학봉(申學奉)·백옥보(白玉甫) 등과 함께 불안해진 중국 정세를 논의하기 위한 협의회를 열었다. 도윤공서(道尹公署)에 가서 도윤과 면담할 대표로 박동원·김옥성을 선정하였다. 8월 29일 국자가 교회에서 개최된 국치일(國恥日) 행사에 참석하여 권사용과 함께 “고국을 잊지 말자”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1919년 1월 25일 국자가 소영자(小營子)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전도회총회에 참석하여 박경철(朴敬喆)·이성근(李聖根)·최원일(崔元一)·서성권(徐成權)·강백규(姜伯奎)·이홍준(李弘俊)·이중집(李仲執)과 함께 국자가 방면에서 전개할 항일운동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2월 초 국자가에서 김약연·조극(趙克)·김신근(金信根)·정재면·김영학·박경철·최원일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자금을 모집에 착수하였다. 파견할 대표로 김약연·이중집을 선정하였고 2월 12일 출발시키기로 하였다. 1919년 2월 17~18일 옌지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 외교과원(外交科員) 박동원(朴東轅)의 집에서 구춘광(具春光)·김신근(金信根)·이홍준(李弘俊)·강백규(姜百圭)·최원일·김정(金精)·고동륜(高東輪)·김영학·고평(高平) 등 16~17명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으로 1인당 50원을 내기로 하였고 국권이 회복되면 공화제(共和制)를 채용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를 위해 독립운동자금으로 500원을 내겠다며 나섰고 독립이 되면 국자가에서 필요한 경비 중 절반을 부담하겠다고 하였다. 1919년 2월 20일 옌지현(延吉縣)에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가 조직되었다. 장협함(張夾咸)·서성권(徐成權)과 함께 재무부위원에 선임되었다. 대한독립기성총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조직이 개편되었다. 1919년 2월 하순부터 3월 상순까지 김영학·박경철·박동원 등과 함께 논의하여 한반도·남만주(南滿洲)·노령(露領)에 있는 항일운동가들과 연락하여 용정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여 국자가·두도구(頭道溝) 등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을 결정하였다. 3월 12일 이홍준(李弘俊)의 집에서 김영학·김기봉(金岐鳳)과 함께 다음날 용정에서 진행될 만세운동을 선전하는 문서를 국자가에서 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25일 와룡동(臥龍洞)에서 박경철·배형식(裵亨湜)과 함께 간도일본총영사관(間島日本總領事館) 국자가분관경찰(局子街分館警察)의 체포를 피했다. 3월 28일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서 약 1천 여 명이 모여 개최된 독립선언축하회에 구춘선·장한봉(張漢鳳)·정현상(鄭賢尙)·김영학 등 11명과 함께 참가하였다. 3월 29일 노령에서 활동하는 항일운동가들과 연락할 목적으로 국자가를 출발하여 훈춘(琿春)을 거쳐 노령으로 향하였다. 4월 지린(吉林)에서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여 활동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8월 27일 지린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이동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일본 군대의 동향을 조사하여 독립운동 진영에 알렸다. 문창범(文昌範)이 의회장으로 있는 국민의회(國民議會)에 참여하였다. 1920년 1월 18일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韓民學校)에서 한인 약 50명이 모여 창립총회를 열고 해항한인상무총회(海港韓人商務總會)를 조직하였다. 해항한인상무총회는 한인 상인들의 사업 편의를 도모하고 나아가 독립운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김치보(金致寶)·최만학(崔萬學)·윤능효(尹能孝) 등과 함께 참가하여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4월 6일 임시정부 임시주외재무관서(臨時駐外財務官署) 부재무관(副財務官)에 선임되었다.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 중 고득성(高得聖)·박운경(朴云京)·홍춘화(洪春化)·박경철·김영학과 함께 대한국민회 무기구입위원에 선임되었다. 7~8월 대한국민회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8월 옌지현 지인향(志仁鄕) 육지동(六地洞)에서 개최된 대한국민회대표자회의에서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9월 18일 왕칭현에서 중국 군대의 동향을 파악하여 대한국민회에 보고하였다. 1921년 1월 구춘선·김규찬(金圭燦)·마진·마용하(馬龍河)·최원일·남세극(南世極)·허동규(許東奎)와 함께 어무현(額穆縣) 액목색(額木索) 배영진(裵永鎭)의 집에 머물렀다. 이 시기 안정근(安定根)과 함께 항일운동가를 규합하여 미산현(密山縣)으로 파견하였다. 같은 해 6월 김일(金鎰)·김약연·황희수(黃希洙) 등을 만나 무산간도(茂山間島)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워싱턴군축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만주와 노령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부대들은 이를 계기로 통합을 모색하였다. 1921년 8월 하순 자유시에서 서일(徐一)·최명록(崔明祿)·이범윤(李範允)·김좌진(金佐鎭)·김하석(金河錫)·홍범도(洪範圖)·안무·이장녕(李章寧)이 모여 군사통일회의를 열었다. 4,230명의 독립군이 동로군(東路軍)·서로군(西路軍)·북로군(北路軍)으로 편성되었다. 워싱턴회의 개최일(11월 11일)로부터 15일 전인 10월 25일에 활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동로군은 훈춘현을 거쳐 함북 경원(慶源)으로, 서로군은 안투현(安圖縣)을 거쳐 함남 삼수와 갑산으로, 북로군은 허룽현(和龍縣)을 거쳐 함북 무산으로 진입하기로 하였다. 어무현 최원일의 집에서 구춘선·유예균(劉禮均)·허동규·마진·마용하·강준(姜俊)·공길선(孔吉善)·최봉의(崔鳳儀)·서성권(徐成權)·남세극·최황(崔晃)·유빈(劉斌) 등과 함께 서로군과 북로군의 활동을 지원할 것을 협의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정하였다. “①각 군대가 통과하는 지방에서는 농민이 경호대를 조직할 것. 경호대는 각 군대의 길안내와 군량징집에 종사할 것, ②경호대는 둔화현(敦化縣)과 안투현(安圖縣), 간도에 조직할 것. 간도에서는 옌지현 도목구(倒木溝) 십리평(十里坪),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삼도구(三道溝), 무산간도 옥석동(玉石洞)과 광풍(廣豊)에 조직할 것, ③옌지현 숭례향(崇禮鄕)에서는 최봉의, 공길선, 화룡현 명신사(明新社)에서는 김영조(金永祚)·최황(무산간도지방)·서성권(徐成權)이 경호대 조직과 대원의 지휘감독을 맡을 것, ④각 경과지역에는 군량적치소를 둘 것, ⑤군량은 경호대 조직 지방에서는 매호 소맥분(小麥粉) 15근씩 징수할 것. 기타지방에서는 제한이 없고 현금으로 납부할 수 있음, ⑥경호대의 조직과 군량징수는 즉시 착수할 것.경호대 조직 임원 최봉의 이하는 9월 하순 옌지현 옹성랍자(甕聲磖子)를 거쳐 각자 담당지역으로 향할 것”이었다. 1921년 12월 5일 둔화현에서 대한국민회원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고려공산당중령총회(高麗共産黨中領總會)에 참가하여 참사(參事)에 선임되었다. 1923년 11월 하순 둔화현에서 구춘선·마진·서상룡(徐祥龍) 등 50여 명과 함께 동성노농공사(東省老農公司)를 조직하고 간사(幹事)에 선임되었다. 동성노농공사는 수전(水田)을 개발하고 한인 사이에 항일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르쿠츠크(Irkutsk)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 대원을 모집하였다. 1924년 2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개최된 한국국민위원회(韓國國民委員會) 제4회 회의에서 남공선(南公善)·김진규(金晉奎)·장정일(張政一)·허동규(許東奎)·이민창(李民昌)·임병극(林炳極)·강수희(姜受禧)·안무 등과 함께 국민위원에 선임되었다. 한국국민위원회는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창조파(創造派)인 김규식(金奎植)·신숙(申肅)·윤해(尹海)·원세훈(元世勳) 등 30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한 단체이다. 1926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남감리교목사 김영학·이규갑(李奎甲), 고려공산당원 이제(李濟)·이영선(李永善)·선봉사(先鋒社) 주간 오성묵(吳成黙) 등과 함께 만세운동 8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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