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秉淇
秉淇1882. 5. 3 ~ 1910. 8.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태원 의병부대
- · 양상기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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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882년 5월 3일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중방면(中方面) 강정리(江亭里, 현 구례군 용방면 죽정리 강정마을)에서 출생하였고, 동군(同郡) 마산면(馬山面) 청천리(淸川里, 현 마산면 마산리 청천마을)에 거주하였다. 구례의 양반가문 출신으로서 송병선(宋秉璿, 字는 淵齋)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유학에 입문하였다. 별명으로 원집(元執)이라 불리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 보호의 미명하에 통감정치를 행하며 한국을 점령하고자 함에도 정부의 대관들은 일신의 안일만을 도모하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이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최우선으로 일본 군대를 몰아내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1907년 5~6월 스승인 송병준을 찾아가 거병의 뜻을 상의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했고 다시 전북 전주(全州)의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광주군(光州郡) 갈전면(葛田面, 현 담양군 대전면) 사람 기우만(奇宇萬), 경상남도 거창(居昌) 사람 곽종석(郭鍾錫) 등을 찾아가 논의하였으나 모두 사고(私考)를 들며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전라도내 담양(潭陽)·장성(長城)·함평(咸平)·보성(寶城)·정읍(井邑)·무장(茂長, 현 고창군 남부지역) 등 20여 군을 돌아다니며 군수(郡守)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이에 협조를 구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 무렵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한국 군대 해산이후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호남의 기삼연(寄參衍)은 1907년 9월 장성 수연산(隨緣山)의 석수암(石水庵)에서 영광(靈光)·나주(羅州)·함평(咸平)에서 활동하던 4~5개의 의병부대를 연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 부대는 그 후 군세를 확장하고자 함평·영광·나주 등지를 돌며 의병을 소모하며 의병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의병을 일으킬 기회를 찾던 중 김태원(金泰元)·김율(金律)·백낙구(白樂九)·조기채(曺基采) 등을 동지로 삼고 김태원을 상장(上將)으로 하여 김율은 중군장(中軍將), 백낙구를 후군장(後軍將), 조기채는 기포장(起砲將)으로 하고 자신은 참모대장(參謀大將)이 되었다. 이러한 편제를 갖춘 의병부대는 약 700명에 500정의 총기로 무장하였고, 세력이 왕성하여 성망(聲望)이 사방에 알려지며 양식과 전곡(錢穀)을 비롯한 기타 군수 용품 등은 1통의 통문을 돌리면 즉각 준비될 정도였다. 이후 주로 함평군 나산면(羅山面)을 중요한 근거지로 하여 담양·영광·창평(昌平, 현 담양군 창평면)·광주·동복(同福, 현 화순군 동복면)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9월중 전북 흥덕군(興德郡, 현 고창군 흥덕면) 사진포(沙津浦)에서 일본인 가옥 3동을 소각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함평군 읍내에서 일본인 가옥 3동을 소각하며 그 세력을 점점 앙양하였다. 그러면서 일본군경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루기 시작했다. 1907년 12월 중 동복군(同福郡) 신평(新坪, 현 화순군 동복면 사평리 신평마을)에서 일제 군경의 토벌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 병사 3명을 처단, ㅅ하고 20여 명에게 피해를 입혔다. 1908년 2월 2일 창평군(昌平郡) 무등촌(無等村, 현 담양군 가사문학면 무동리)에서는 일본군 토벌대와 싸워 카와미에(川滿) 조장(組長)과 하야시(林) 상등병 등 수명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고, 쌍안경 1점, 단총(短銃) 1점, 군도(軍刀) 1점을 노획하였다. 같은 달 21일 장성군(長城郡) 서이면(西二面, 현 황룡면)에서 토벌대와 접전을 벌여 큰 피해주고 총 40정을 노획하였으나 의병부대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30여 명의 부대원이 전사하고, 자신도 오른쪽 허벅지에 총상을 당하였다. 이후 다시 나주군 도치(島峙, 현 나주시 남평읍 수원리 부근)에서 토벌대와 싸워 3명을 처단하고 총 20정을 수습하였다. 같은 해 3월 14일 영광군(靈光郡) 봉산면(奉山面, 현 백수읍)에서 토벌대와 충돌하여 일본군 기병 중위 스가이(管井佐久) 외 일등병(一等兵) 1명을 부상 입히고 총 4정을 노획했으나 약 3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 해 3월 중 나주군(羅州郡) 용진산(龍津山)에서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이던 중 상장(上將) 김태원이 전사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순창군(淳昌郡) 산막(山幕, 현 임실군 강진면 문방리 산막마을)에서 일본 군경의 내습을 받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후군장(後軍將) 백낙구 외 10명이 전사하였다. 김태원, 백낙구 등 부대의 주요 인물이 전사한 뒤, 그 해 5월 30일 창평군(昌平郡) 용흥사(龍興寺)에서 다시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교전 중에 왼팔과 왼쪽 복부에 총상을 입었고, 기포장(起砲將) 조기채 등 8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처럼 부대의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고, 큰 부상을 당하면서 부대는 거의 와해되었다. 이에 일제 군경의 눈을 피해 은거하며 부상치료에 전념하며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8년 10월부터는 양상기(梁相基)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양상기 부대에서 참모장(參謀長), 중군장(中軍長) 등을 맡아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 (음)2월 11일 총기 30정을 휴대한 부대원 40여 명과 담양군 동면(東面) 남산리(南山里, 현 담양읍 남산리)에 거주하는 정준필(鄭準弼) 및 국사윤(鞠士允)을 동군 두면(豆面) 연동(蓮洞, 현 봉산면 연동리)으로 불러내어 군자금 1만 냥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3~4일 후에 마을의 이장(里長) 남준여(南俊汝)의 손을 거쳐서 각각 2백 냥을 거두었다. 이어 같은 해 (음)2월 14일에는 50여 명의 부대원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木面) 강정리(江亭里, 현 담양읍 강쟁리)의 부호(富戶) 수명을 설득하여 한중여(韓仲汝)에게 돈 3냥 외 1점을, 김도일(金道日)에게서 돈 40냥 외에 2점과, 서권일(徐權日)에게서 돈 45냥 외에 1점과, 한내진(韓乃珍)에게서 돈 17냥 외에 1점과, 김자삼(金自三)에게서 돈 22냥 외에 1점을 군자금 명목으로 징수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09년 (음)2월말 담양군(潭陽郡) 삼지촌(三支村, 현 창평면 삼지내마을)에서 부대의 비행(非行)을 꾸짖는 일을 계기로 양상기와 불화가 발생하고 다투던 중 칼로 오른손과 오른쪽 어깨에 참상(斬傷)을 당하였다. 이에 양상기의 부대에서 나와 은거하며 또 다시 의병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던 중 1909년 11월 8일 구례에서 광주 경찰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소회를 묻자 죽음을 담담히 예상하며 거의가 성공하지 못함을 한탄했으나, 자신의 죄과(罪科)로 백형(伯兄) 유병규(劉秉奎)와 중형(仲兄) 유병익(劉秉益), 자신의 처 김소사(金召史)와 장남 유장렬(劉璋烈) 등 형제 가족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를 바랬다. 1909년 11월 27일 내란죄 피고인으로 광주지방재판소에 송치되었고, 1910년 3월 29일 동 재판소에서 이른바 폭동죄와 강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0년 5월 1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그 결과 교수형이 확정되어 같이 재판을 받은 양상기와 함께 그 해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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