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형
安在瑩1882. 6. 28 ~ 1935. 6.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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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2년 6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외암리(外岩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희숙(希淑), 호(號)는 도남(道南)이다.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친구 이연건(李鍊乾)이 저지하여 무산되었다. 1919년 고종의 국상에 다녀온 안재휘(安在輝)·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 등 지역 인사에 의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곧바로 3월 19일 함안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고종 국상에 다녀온 인사들 중 안재휘는 사촌 동생으로, 그에게서 만세운동 소식을 전달 받았다. 1919년 3월 19일은 함안읍의 장날이었다. 이날 오후 1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안재휘, 그리고 친동생인 안재원(安在遠)과 함께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함안읍 만세시위는 비봉산(飛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고, 태평루(太平樓)에 걸린 태극기 아래에서 동명학교(東明學校) 교사 이희석(李喜錫)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장날을 맞이하여 3천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함안 읍내 만세시위는 단순히 시가행진을 하면서 독립의지를 표명하는 데 그쳤던 초기 만세운동 양상과 달리 일제에 대한 공격적인 형태로 전환하는 기점에 있었다. 몽둥이를 들고 투석전을 전개하는 등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함안군청, 경찰관 주재소, 우체국, 등기소 등 일제 식민통치 기관들을 습격하였다. 경찰관 주재소의 경우 6회에 걸쳐 습격하여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함안 경찰관 주재소와 등기소에 들어가 기물을 파손하였다. 결국 일본군 중포병대대까지 합세하여 진압에 나서면서 만세시위 군중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고, 곧 시위 주도자로 붙잡혔다. 일제 군경에 의한 만세시위 참가자에 대한 색출과 체포는 시위 다음날인 3월 20일까지 계속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으며, 붙잡혀 간 사람들 중 무려 6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시위에 대해서 조선헌병대사령부는 경상도에서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심한 ‘악성 소요’라고 하였다. 시위대 선두에서 태극기를 치켜세우고, 등기소를 습격하여 소장을 죽인다고 외치면서 군중을 안으로 불러들여 기물을 파손하였다는 이유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의 1심 재판과 대구복심법원에서의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신간회(新幹會) 등에 참여하여 안재홍(安在鴻)·홍명희(洪命憙)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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