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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혁중

安赫中

1879. 5. 14 ~ 1919.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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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안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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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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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함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9년 5월 14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耶面) 검암리(儉岩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안승학(安昇鶴)이 있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19일의 함안군 읍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하였다. 함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다른 지역과 달리 상당히 일찍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칠북면(漆北面)에서 기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3월 9일의 연개장터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4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3월 19일의 함안 읍내 만세시위는 순사주재소와 군청을 비롯하여 읍내에 소재한 거의 모든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대상으로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어 경남 지역의 대표적인 만세시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함안 읍내 만세시위는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한관렬(韓灌烈)·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 등의 봉성리(鳳城里) 인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고종의 인산(因山)일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체재하는 과정에서 3월 1일의 독립선언식과 이후 전개된 만세운동에 전개하였다. 이후 이들은 함안에서도 만세운동을 조직하겠다는 결의로 독립선언서를 품속에 숨겨 귀향하였다. 3월 5일경 함안으로 돌아온 조한휘·한종순·한관렬 등은 곧바로 만세시위를 함께 준비할 동지의 규합에 노력한 결과, 지역에서 근대교육을 실시하고 있던 동명학교(東明學校)의 교사 박건병(朴健秉)·강기수(姜琪秀)·이희석(李喜錫) 등이 동지로 결합하여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또한 지역의 대표적인 유림이면서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산면(代山面)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그의 자문을 받아 인근에서 많은 주민들이 모이는 함안읍 장터의 장날인 3월 19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들은 안신학교(安信學校)와 동명학교 학생들의 협력을 받아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요약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할 축약된 독립선언서 제작과 등사, 만세시위의 계획을 각지에 전달하는 등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함안 읍내 만세시위에 대한 계획을 사전에 연락받고, 그 취지에 크게 공감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만세운동의 거사일인 3월 19일 아침 일찍 이미 만세시위에 참여 의사를 밝힌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읍내의 장터로 나갔다. 다른 지역의 주민들도 속속 함안 읍내 장터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찬영을 중심으로 일부 인사들이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정오를 기하여 만세시위의 시작을 하늘에 알리는 고천제(告天祭)를 올린 후, 오후 2시경 이희석이 장터의 한복판에서 손을 높이 치켜 올렸다. 이것이 본격적인 만세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신호에 맞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순식간에 3,0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참하여 만세시위 대열을 이루었다. 이어 곳곳에서 주도 인물들과 안신학교, 동명학교 학생들에 의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이희석이 독립선언서 낭독을 끝낸 후,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일제히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이희석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향해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첫 번째 목표 대상은 순사주재소였다. 당시 일제 경찰들은 주변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계속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3월 18일부터 마산(馬山)경찰서장 기타무라 세이조우(北村淸澄)까지 함안으로 출동하여 비상경계 근무를 하고 있었다. 기타무라 서장을 위시한 일제 경찰들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즉각 해산을 명령하였다. 만세시위대가 이에 불응하자, 일제 경찰들은 즉시 무력을 사용하여 만세시위대를 탄압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 경찰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여 순사주재소 및 군청, 우편소 등의 습격을 주도하였다. 안재형(安在瑩)·백낙삼(白樂三)·이규석(李圭錫) 등과 함께 도끼·몽둥이·돌멩이 등으로 무장하고 분노한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로 쳐들어가 일제의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후 주민들을 지휘하여 함안군청·함안우편소 등으로 가서 각각의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폐기하였다. 우편소를 습격할 때 조한국(趙漢國)과 강상중(姜相中)은 전화기를 부수고, 전화선을 절단하여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을 차단시켰다. 특히 주재소와 군청을 습격할 때, 이종찬(李鍾瓚)·조계승(曺啓承) 등과 함께 마산경찰서장 기타무라와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그들이 입고 있던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이들에게 독립선언서을 쥐어주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압박하였다. 또 경찰서장에게는 함안 주민들의 「독립운동 확인 사실증명서」를 요구하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당시 프랑스의 파리(Paris)에서 개최중이었던 강화회의에 한국의 대표를 파견하였고, 열강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달성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관리부터 독립운동의 사실을 확인받아 이를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근거로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타무라와 민인호 모두 요구에 응하지 않자 이종찬·조계승 등과 함께 이들을 구타하였다. 이후 등기소, 부산지방법원 함안출장소, 일본인 소학교 등 식민통치기구로 차례로 시위 행진하였다. 마산의 일본군수비대는 함안과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함안에서 큰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으로 짐작하고, 오후 5시 40분경 중무장한 중포병대대 병력 21명을 함안으로 급파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대의 주도 인물들은 이대로 만세시위를 계속하게 되면,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많은 주민들의 피해가 예상되어 시위를 자진 해산하였다. 그럼에도 일제 군경은 총검을 휘두르며 곧바로 만세시위의 주도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지호·안재형, ·조계승 등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같은 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으나 1심과 동일하게 징역 3년을 받았다. 대구감옥에 투옥되어 옥고를 겪던 중, 고문의 후유증과 열악한 감옥 환경 등의 영향으로 1919년 9월 2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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