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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연

元鑄淵

1911. 12. 23 ~ 1936.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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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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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정평(定平)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정평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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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정평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광주항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911년 12월 23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동천리(東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부친은 함경남도 정평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원종집(元鍾潗)이고, 모친은 전주 노씨(全州) (盧氏)이다. 5남 1녀 중 차남(次男)이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놓여있는 민족의 현실에 분노하면서 독립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동흥리(東興里)로 이주하여 함흥보통상업학교(咸興普通商業學校)에 진학하였다. 1929년 광주 시내에서 발생한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이 야기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그간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민족차별의 설움을 받아온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들의 시위는 1930년 5월까지 전국적인 동맹휴학, 학생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함남 지역 역시 1929년 말부터 함흥 영생중학교, 함흥농업학교 등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벌이거나 단체로 수업을 거부하였다. 1930년 1월 11일 함흥공립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 함흥 영생중학교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것을 하는 것을 보고 고무되어 동급생인 최예진(崔禮鎭)의 집에서 교우들과 비밀리에 회합하였다. 이들은 “광주 사건은 민족적 투쟁에 기인하는 것으로 우리도 이에 항거하여 시위행렬에 나서야 한다. 따라서 1월 14일에 조례 후 다른 학생들도 참여시켜 시위행렬을 결행하자”고 말한 뒤 자리에 모인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1월 14일 오전 조례를 마친 교직원들이 교무실로 들어가자 드디어 최예진이 앞으로 나와 “조선 학생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자 약 60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를 제창하면서 “모이라! 우리 전사여 영광의 깃발 아래로”라고 적힌 깃발을 흔들며 열을 지어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대열의 앞에서 군중들과 함께 교문을 나서 신탄시장을 지나 경찰서에 이르는 도중 미리 준비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선전물 약 200장을 거리에 배포하였다. 시위대는 시위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고, 동지들과 함께 시위의 주도자로 간주되어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0년 2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같은 해 3월 27일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1931년 1월 15일 정평군에서 조직된 정평농민조합(定平農民組合)에 가입한 뒤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지주의 고리대 착취 및 소작권 박탈, 부당 납세에 반대하였고, 강제부역과 고농(雇農)에 대한 착취 및 박해에 반대하여 빚문서를 소각하거나, 농장사무소를 습격하거나, 일제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각종 방법으로 지주와 지주를 보호하는 일제 관헌에게 대항하여 농민 생존권 확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정평군 전 지역으로 농민투쟁을 확대하기 위해 대규모의 농민대회를 개최하여 2,000여 명의 군중들과 항일시위를 전개하다가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1932년 12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33년 1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고문의 여독으로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어 1936년 3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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