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京乙
京乙1901 ~ 1930. 7.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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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2)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다면(何多面) 송파리(松坡里)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901년생으로 추정된다. 1930년 7월 20일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단천군삼림조합의 삼림간수(森林看守) 양성환(梁聖煥)이 산림 도벌(盜伐) 행위를 취조한다는 구실로 단천군 하다면 연대리(蓮臺里) 허달규(許達圭)의 집을 찾았다가, 허달규가 집에 없자 그 부인을 감금하여 신문하고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평소 삼림조합의 산림자원 이용 통제 및 삼림조합 간수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주민들은 양성환의 만행에 분개하여 1930년 7월 17일 그를 허달규 집으로 끌고 가 무리한 단속에 항의하였다. 다음날인 7월 18일 단천삼림조합 간사인 고토 겐이치(後藤礎一)는 양성환 사건을 보복하기 위해 설효식(薛孝植)을 면사무소에 출두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삼림조합과 하다면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자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김형묵(金衡黙)은 이를 기회로 단천삼림조합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단천청년동맹(端川靑年同盟)·단천농민동맹(端川農民同盟) 및 주민들에게 하다면사무소 앞으로 모이도록 연락했다. 이 때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하다면사무소를 항의 방문하여 고토 겐이치에게 항의하고 면사무소 업무를 마비시켰다. 이후 삼림조합 문제가 면사무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주민들과 함께 단천군청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이들이 남대천(南大川) 다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단천경찰서 경찰들이 길을 막고 방해하여 자진 해산하였다. 7월 19일 새벽 일제 경찰은 주도자 53명을 붙잡았다. 이에 격분하여 4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그날 아침 군청으로 몰려가 군수와 면담을 요청하고,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주민들과 함께 군민대회를 열어 본격적으로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을 전개하고자 논의하였다. 주민들이 해산하자 일제 경찰은 군민대회 개최를 막기 위해 그날 밤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반대투쟁의 지도부를 체포했다. 일제 경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7월 20일 오후 4시 2천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군민대회에 참여하였다. 단천군수 임창재(任昶宰)에게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 조건으로 제시했지만 단천군수는 이를 거절하였다. 위와 같은 군수와의 면담 결과에 크게 격분하여 2천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단천군청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유리창 580여 개를 깨뜨리는 등 단청군청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에 놀란 군수와 군직원들은 모두 도주하였다. 군청을 공격한 후 다시 주민들과 함께 구속된 주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단천경찰서로 몰려갔다. 단천경찰서에 도착하여 투석을 통해 경찰서의 창문을 파괴하는 등 선두에 서서 경찰서를 공격했다. 이에 단천경찰서를 수비하던 30여 명의 경찰들은 공포탄 75발을 발포하였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경찰이 실탄을 무차별로 난사하여 4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때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민들을 독려하다가 총격을 입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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