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근
安敬根1896. 6. 10 ~ 1978. 12.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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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896년 (음)6월 10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동(淸溪洞)에서 안태민(安泰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호는 석천(石泉)이다. 일제 측 조사에 따르면 이명으로 이관오(李冠五)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박양근(朴陽根)·안사준(安士俊)·마포곡(瑪蒲谷)·이석천(李石川)이라는 이명도 사용하였다. 동생은 안형근(安炯根)이고, 사촌 형이 안중근(安重根)이다. 1914년 김마리아와 결혼 후 1918년경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독립운동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안정근(安定根)·안공근(安恭根) 등과 항일활동을 하다가, 1921년 봄 상하이(上海)로 향하였다. 이어 1922년 4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로부터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파견되어 수학한 다음, 1924년 12월 초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귀환 후 군사참리본부 참모총장 노백린(盧伯麟) 지휘 하에 활동하였다. 이후 만주로 가서 정의부(正義府) 군사부 위원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가, 다시 광저우(廣州)로 이동하여 1926년 11월~1927년 8월에 이르는 5기생 입교기간 동안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최용건(崔庸健)과 같은 기숙사에서 지냈고, 이 인연으로 1948년 남북협상 시 김구(金九)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테타’, 그 해 8월의 ‘난창기의(南昌起義)’, 12월의 ‘광저우기의(廣州起義)’ 등으로 국·공 합작이 파국 상황에 직면하였고, 1929년 만주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3부 통합운동에 실패하자 상하이로 돌아갔다. “상해 홍커우(虹口)에서 윤봉길 의사의 4·29 사건이 생긴 다음부터는, 백범 선생과 시종 함께 다니면서 그를 많이 도와”드렸다는 일제 정보 자료의 기록처럼, 1932년 이후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홍커우 의거를 계기로 성립된 한·중 연대를 배경으로 김구를 도우며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운영과정에서 ‘생도계’라는 직책을 맡아 입교생들의 일상생활과 교육과정을 관장하였다. 또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와 일시적으로 결별하고 있던 김구의 활동기반인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학생훈련소 운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3년 9월 13일 새벽에는 김구와 함께 선편으로 항저우(杭州)에서 쑤저우(蘇州)에 갔다가, 9월 15일 오전 7시 열차편으로 난징(南京)에 도착하였다. 이어 9월 18일에는 혼자 상하이에 갔다가 26일 난징으로 돌아와 김구를 중가항(中家巷) 21호로 옮기는 등 김구의 신변을 보살피고 거처를 확보하며 경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34년 12월 중순 난징의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에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 등 외빈과 안공근(安恭根) 이하 김구 계열 인물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재학 중인 한인 입교생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김구 혁명 40주년 기념축하회’ 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오늘은 김구 선생이 혁명전선에 나서신 이후 만 40주년에 해당되는 날이다. 본래라면 아주 성대하게 이 기념식을 거행해야 하지만, 주변 정세가 허락지 않아 여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기념축하회를 거행하는 바”라는 내용의 개회 인사를 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1일 거행된 한국특무대독립군 대원들의 3·1운동 기념식에서는 폐회사를 하였다. 이와 함께 대원들의 불평과 요구사항을 청취하고, 이들을 위무·통제하는 일도 맡았다. 이에 대해 후일 김구의 아들 김신(金信)은 “남경에 살 때, 할머니(곽낙원-필자)가 아버지를 만나려면 나를 시켜서 안중근 의사의 사촌인 안경근에게 연락했어요. 몇 단계 경로를 거쳐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뵐 수 있었지요”라고 회고하였다. 1935년 김구가 장쑤성(江蘇省) 용지산(龍池山)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라는 사찰에서 훈련받고 있는 학생훈련소 대원들을 방문하였을 때, ‘신변 경비’ 자격으로 동행하였고, 그 해 9월 하순에도 난징 성내에서 김구를 경비하는 모습이 일제 기관에 포착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인 아나키스트들과도 연대하여 의열투쟁 전개하기도 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엄순봉(嚴舜奉)·이달(李達) 등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단원들과 협력하여 난상(南翔)에서 일제 밀정으로 지목받던 이종홍(李鍾洪)을 살해하였다. 1937년 가을에는 정화암(鄭華岩)·나월환(羅月煥)·유자명(柳子明) 등 아나키스트들과 제휴하여 상하이에서 일본군 후방 교란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1937년 8월말,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김구를 수행하여 몰래 상하이에서 중국 측 군정 인사를 방문하고, 프랑스공무국 정치부장인 러시아인 엠리야노프와 장시간 회견하였다. 3일 후 김구와 엄항섭이 난징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하이에 잔류하며 김동우·문일민 등을 만나 모종의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때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하루에도 옷을 몇 번씩 갈아입곤 하였다”고 전해진다. 1936년 11월 10일 자싱(嘉興)에서 개회한 제2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안공근 등과 함께 황해도 의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후 1937년 7월 16일,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열고 중일전쟁이라는 ‘호기(好機)’를 맞이하여 군사 활동을 극대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대일 군사활동을 기획·지도할 기구로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를 설치하였고, 이때 유동열·이청천·이복원·현익철·김학규·나태섭·황학수·공진원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42년 말에는 「몇 가지 긴급히 할 일」이란 글을 통해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당면과제로 ‘독립운동 역량의 극대화, 거대한 규모의 운동자금의 신속한 확보, 조속한 임정 승인 획득, 임정의 권위 아래로 전민족 집결’을 제시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된 뒤, 1946년 5월경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며, 귀국 후에도 경교장에서 기거하다시피 하였다. 1946년 11월 말 중간노선을 표방한 민중동맹결성준비회 조직부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앞두고 4월 7일 김구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되었다. 이튿날 저녁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을 만나 회신을 받은 후 4월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이를 토대로 김구는 4월 19일 북한을 방문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고,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 서울이 점령당하자 숨어 지내다가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 가 23년간 살았다. 1960년 4·19혁명 직후 민주구국동지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 모임이 10월 22일 경상북도 시국대책위원회로 개편되자,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 해 11월 26일 다시 경상북도 민족통일연맹으로 개편하여 서울의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도왔다. 이 시기 경북·대구지역의 통일운동을 주도하면서 계속해서 위원장직을 맡았다. 5·16군사쿠데타로 붙잡혀 “북한 괴뢰집단의 활동을 고무·동조하는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1962년 1월 징역 7년을 받고 복역 중, 1963년 12월 16일 일반사면으로 석방되었다. 1978년 12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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