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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時彦

時彦

1895. 3. 15 ~ 1945.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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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柳時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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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고려공산당
  • · 길림교육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5년 3월 1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천면(豊川面) 하회동(河回洞)에서 태어났다. 1924년 재판 당시 직업은 무직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양반으로 교육을 받은 인텔리 출신이었다. 10대에 하회동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졸업한 후 19~23세까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서울·평양 등지에서 수학 중인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만세시위를 기획하거나 합류하였는데, 이때 3월 13일부터 격화된 안동지역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1919년 5월 무렵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펑톈(奉天)으로 가서 푸순(撫順)의 동사성동학교(東社盛東學校)에서 한인 청소년들을 교육하다가, 1920년 상하이(上海)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 등의 조직을 국내에 마련하여 독립운동의 선전과 조직원 포섭뿐만 아니라 군자금 모집 등을 진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유성우(柳性佑)와 함께 귀국하여 경북 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1920년 5월 4일 경북 문경군(聞慶郡) 산북면(山北面) 서중리(書中里) 장수학(張守學)의 집에서 115원의 군자금과 5,000원의 기부서약서를 징수하였다. 또한 같은 해 6월 1~2일에는 안동군 풍서면(豊西面) 구담동(九潭洞)의 김기혁(金基爀)에게서 200원의 군자금을 징수한 후 중국으로 귀환하여 수천 원의 군자금 중 일부를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함께 활동하였던 유성우는 일제 경찰에 붙잡혀 옥사하였고,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1920년 10월 무렵에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만산(萬山)에서 김정묵(金正默)·최용덕(崔用德) 등과 함께 집의학교(集義學校)를 설립하여 교사로서 약 1년간 재직하였다. 다음 해 4월경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느끼고 교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러시아 치타(Чита)에 가서 공산당에 입당하고 4개월간 체류한 후, 1922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로 이주해 한인 촌락의 공산당 지도자 이성(李成)의 휘하에서 지방선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상하이로 귀환하여 한국인 공산당원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길림성(吉林省) 액목현(額穆縣) 중아학교(中亞學校)에서 한인 자제의 교육과 주의 선전을 진행하였다. 이후 같은 해 10월 길림으로 이동하여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과 협의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고려공산당 선전부에서 이동휘(李東輝)와 이성 휘하에서 지방선전원으로 복무하였다. 12월 중국에 소재한 길림교육회(吉林敎育會)의 선임을 받아 상하이에서 개최되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길림교육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에 1923년 1월경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표위원 겸 헌법개정위원(憲法改正委員)과 교육위원장(敎育委員長)에 선출되어 군자금 모집, 독립사상 선전, 외국과의 교섭과 무기조달 등을 논의하였다. 같은 해 2월 소련의 지원금 문제를 두고 임시정부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더불어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간에도 논쟁이 벌어졌고, 이때 중립적 입장에 있었다. 1923년 2~3월경의 논의에서 “여러 단체가 모두 복종만 하면 창조도 할 수 있고 개조도 할 수 있다.”며, 임시정부 창조·개조의 논의 자체보다 실질적 통일의 확보가 우선이라고 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없이하고 다시 새 정부를 창조함이 통일상 오직 하나의 좋은 계책”이라 하여 창조파의 논의를 골자로, “서로 양보함이 옳은 일이라 생각”한다는 과정상의 양보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19인의 동료와 함께 개조파의 입장에 친근한 안을 발표하는 등 절충을 시도하여 원세훈(元世勳) 등의 반대를 받으면서도, 안창호(安昌浩)·정광호(鄭光浩) 등과는 대립하는 입장을 보였다. 한편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이 점차 혼선에 빠지자 만주로 떠났다. 1923년 6월 15일 지린성 장춘(長春)에 도착하였는데, 거동을 수상히 여긴 일제 경찰에 붙잡혀 같은 해 6월 22일 국내로 이송되었다. 1924년 10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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