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옥
姜希玉1910 ~ 1931. 11.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공산청년회
- · 조선학생과학연구회
- · 중앙청년동맹
- · 고원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함흥고보동맹휴학사건
- · 광주학생독립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1910년경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순녕면(順寧面) 석북리(石北里)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경찰서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양반’으로 밝힌 점으로 미루어 사회경제적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함흥 지방에 있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경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3학년에 재학 중인 1928년 7월 함흥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키자 4학년생 홍철수 등과 함께 동맹휴학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퇴학 처분을 받았으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계기가 되었다. 1928년경 상경하여 서울의 사립 중동학교(中東學校) 특과 1학년생으로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4월 본과 4학년에 편입하였다. 반일 의식과 행동은 중동학교에서도 이어졌다. 1929년 7월 권유근(權遺根)의 집에서 부건(夫健)의 권유를 받아서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의 비밀 세포조직인 가두반(街頭班)에 참여하였다. 조선공산청년회는 4월 심치녕(沈致寧)·부건·곽양훈(郭良勳)이 중심이 되어 공산당 조직의 필요성을 공감하여 조직한 것으로, 가두반은 조선공산청년회 중앙간부회 임원들이 각 중등학교에 비밀결사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하에 결성였다. 가두반은 즉흥적인 학생운동을 지양하고, 사상 교육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학생운동을 전개하고 ‘공산 운동 투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가두반의 구성은 배가법(倍加法)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1개의 세포는 3명으로 구성되며, 이들 가운데 1명이 책임이 되고 남은 두 명은 부수(附隨)가 되었다. 부건·권유근 등과 함께 3명으로 구성된 가두반을 구성하였는데 부건은 책임을 맡고, 권유근과 함께 부수를 맡았다. 1929년 9월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朝鮮學生科學硏究會), 10월에는 중앙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권유근·부건과 회합하고 중등학교를 분담하여 가두반을 확대 조직하기로 하였다. 부건은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를, 권유근은 경신학교(儆新學校)·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맡았다. 이때 중동학교를 맡아서 자신이 책임이 되고 김인배(金仁培)와 김용우(金用雨)가 부수가 되는 가두반을 조직하였다.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곽이형(郭二炯)·김인배·윤영순(尹暎淳)·김형석(金炯錫)·이일신(李一信) 등과 함께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지지 여론 조성과 반일 시위 확대를 목적으로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 및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선전 문건을 학생들에게 돌렸으며, 학생운동을 대중운동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2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고초를 겪은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학생운동의 경험은 농민조합 활동으로 이어졌다. 1931년 음력 7월경 고원군(高原郡)에서 고원농민조합 중앙간부로 활동하였다. 고원농민조합의 활동 목적은 사유재산제도 폐지와 공산제 실시를 통한 일제 타도에 있었다.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에 수학한 경험이 있던 조신녀(趙信女)를 부녀부장, 고원공립보통학교 졸업생 조성철(趙誠哲)을 교양부장으로 포섭하여 농민조합의 역량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9월 24일 일제 경찰에 다시 체포되어, 11월 13일 고원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유치장에 갇혀 있던 중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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