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호
安宗鎬1886. 4. 24 ~ 1961. 6.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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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6년 4월 24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咸安靣) 강명리(康命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안종호(安鍾浩)를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함안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5일 고종 국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이찬영(李讚榮) 등 지역 인사들은 지역 유림으로 서당 선생이었던 안지호(安知鎬) 등과 논의하여 읍내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여기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함안읍 장날인 3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 전단 작성 및 등사,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등 역할을 분담하였다. 거사 당일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역할을 담당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9일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여 읍내 장터에 모이도록 하고, 오후 1시경 비봉산(飛鳳山)에서 만세시위를 알리는 고천제(告天祭)에 참석하였다. 이후 태평루(太平樓)의 독립선언식과 함께 시작된 만세시위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수백 명으로 시작한 만세군중은 장날 읍내에 나온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3천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경찰관 주재소·군청·법원출장소·우체국 등에 투석전을 감행하여 유리창 등을 파손하였고, 건물 내부로 들어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물과 서류를 파손하고 관계자에게 물리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선두에 군중을 지휘하며 활약하였다. 만세시위 군중의 규모가 급격히 불어나고, 기관에 대한 투석전과 내부 진입 등이 발생하자, 일제 경찰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에 진압 요청을 하였다.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폭력적인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대는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제 군경은 만세시위 주도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전개하였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다.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거처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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