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복
安贊福1879. 12. 9 ~ 1945. 1.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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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9년 12월 9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신안주면(新安州面) 송성리(松城里)에서 태어났다. 20세를 전후한 시기에 평남 안주군 용화면(龍花面) 용담리(龍潭里)로 이사하여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였다. 이 무렵 천도교를 접하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안주군 안주읍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2월 말 무렵 천도교 본부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에 대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당시 천도교 안주 교구장이었던 김안실(金安實)은 서울로부터 온 독립선언서를 확인하고 천도교회 간부인 김광호(金光浩)·김춘택(金春澤) 등과 상의하여 안주 공립보통학교 교사 차신정(車信正)을 평양에 보내 자세한 사항을 확인하였고, 3월 3일을 거사일로 잡고 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이에 안주군 내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에 연락하여 교인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3월 1일 김찬성(金燦星)·김화식(金化湜) 등을 중심으로 하는 안주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안주읍 서문 앞에서부터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 때 이미 천도교 본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안주읍에 도착해 있었는데, 기독교계가 주도하였던 3월 1일 시위에도 참가하여 태극기를 산포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3월 1일 밤 김찬성·김화식·박의송(朴義松) 등 기독교계의 주모자 10여 명이 체포당하여 헌병대에 구금되자, 이에 항의하고자 3월 2일 낮 헌병대 앞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가하였다. 이어 3월 3일 오전 11시 율산공원(栗山公園)에는 천도교도를 비롯하여 군중 5,000여 명이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모여들었다. 독립선언식을 거행 한 후, 사람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악대(樂隊)가 북을 치는 가운데 서문연당(西門蓮塘), 공립보통학교, 서강(西岡) 방면 공립농업학교(公立農業學校)를 지나며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후 군청과 평양지방법원 안주지청을 거쳐 최종적으로 헌병대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3월 1일 시위에서 체포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 헌병은 이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총탄을 쏘며 시위대의 해산을 기도하였다. 이로 인해 천도교인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으며, 5명이 부상당하였다. 이 때 시위대의 앞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제 헌병의 사격으로 인해 사망 혹은 부상당한 사람들을 인근 의원으로 부축하며 옮기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이로 인해 일제 헌병에게 가혹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한 이후 이후에도 천도교도로서 생활하다가, 1944년 천도교도 13명이 징병되어 갈 당시 일본의 패망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 발각되어 또다시 붙잡혔다.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겪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을 목전에 둔 1945년 1월 9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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