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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렬

安彰烈

1881. 5. 15 ~ 1919.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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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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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陰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음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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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음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1년 5월 15일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소이면(蘇伊面) 갑산리(甲山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 음성군 소이면 한내(漢川)장터 만세시위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총탄에 피격되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음성군에서는 4월 초순에 집중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소이면에서는 김을경(金乙卿)·이중곤(李重坤)·권재학(權在學)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한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순사주재소 습격으로 이어지는 격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부 기록에서 1919년 3월 19일 소이면에서 김을경·이중곤·권재학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서술이 보이며, 또 다른 기록에는 3월 19일과 4월 1일을 모두 주도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3월 19일 만세시위는 일제 기록 등 당대 기록에서 실체가 확인되지 않으며 4월 1일 만세운동 상황을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을경은 3월 1일 이래 전국 각지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중곤·권재학과 협의하여 소이면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한내장터의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김을경·이중곤·권재학은 4월 1일 오전 11시 경 한내장터로 나왔다. 이들은 장터의 한복판에서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주변의 주민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고 주장하면서 만세를 선창하였다. 장을 보러 장터에 나왔다가 이 모습을 목격하고 크게 공감하여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주도인물들의 지휘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이후 만세시위의 방향은 일제의 말단 통치기구인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만세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 앞으로 이동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면사무소 앞에서의 만세시위 도중 김을경은 면사무소에 있던 면장 민병식(閔秉植)을 앞뜰로 끌어내 “너도 조선 사람인즉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자. 만일 불응할 경우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만세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민병식은 시위대의 앞에서 두손을 높이 들어 만세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기세가 올라 더욱 소리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만세시위에 동참하는 주민들도 더욱 많아져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시위가 확대되자. 일제 경찰들이 출동하였다. 일제 경찰의 만세시위 해산 명령에 불응하고 김을경 등의 지휘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계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주도 인물인 김을경과 이중곤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일제 경찰의 만세시위 주도자 강제 연행은 시위대를 더욱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보고 분노한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체포를 피한 권재학의 지휘에 따라 소이면 순사주재소로 달려가 일제 경찰에 분노를 표출하며 김을경과 이중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권재학은 “어째서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는가. 당장 석방하라”고 호통을 치며 주재소의 장지문을 발로 걷어차 파괴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이용호(李龍浩)는 시위대 선두에서 일제 경찰의 주도자 체포를 규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대의 주재소 습격을 독려하였다. 다른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였다. 만세시위가 격렬해지자, 만세시위에서 이탈하는 주민들이 발생했다. 이에 추성렬(秋成烈)과 이교필(李敎駜)은 연행된 주도자들을 탈환하자고 절규하며 만세시위에서 이탈하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만세시위가 계속되도록 노력했다. 더 이상 소이면의 일제 경찰력으로는 만세시위를 해산시킬 방법이 없었다. 일제는 소이면의 만세시위 상황을 접수하고, 곧바로 충주(忠州)의 일본군 수비대를 지원 병력으로 급파하였다. 오후 3시경 소이면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곧바로 만세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발포로 대응하여 만세시위를 해산시키는 동시에 만세시위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에서 이태수(李太壽) 등 모두 6명이 사망했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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