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봉
吳海鳳1897. 7. 26 ~ 1965. 5.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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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7년 7월 26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동(新里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19일 영덕군 창수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창수면 만세운동은 전날인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시장 만세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영해면에서 영덕군 각지의 군중 2,0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영양군(英陽郡) 출신 유생 이종구(李鐘龜)는 동네 주민들과 의기투합하여 영해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자 길을 나서게 되었다. 길을 가던 도중 창수면 신기동(新基洞) 마을 구장(區長) 이현설(李鉉卨)과 창수동 마을 구장 이수각(李壽珏) 등과 만나게 되었다. 서로 모여 논의를 해보니 영해면까지 가기에는 이미 시기가 늦었으므로 영해면 행을 중지하고 창수면에서 사람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이수각과 이현설 등은 창수면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서 사람들을 규합하게 되었고 오해봉은 이들의 권유에 이끌려 만세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창수면 만세운동은 약 400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윤학근(尹學根)·정재주(鄭在珠)·손상석(孫尙錫)·이성백(李成伯)·우주일(禹周逸)·김연순(金演淳) 등 다른 신리동 주민과 함께 시위대에 합류해 주도적으로 시위를 이끌게 되었다.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창수동에 소재한 창수주재소까지 행진하게 되었는데, 오후 4시경 시위대 행렬은 주재소에 다다르게 되었다. 창수주재소에서는 전날부터 영해면을 비롯한 영덕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던 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일제 경찰들이 이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수 백 명 군중의 격렬한 시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시위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 건물과 기타 기물과 공문서 등을 파손하기에 이르렀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각기 준비한 곤봉, 도끼 등을 사용하거나, 돌을 던지기도 하고 아니면 맨손으로 달려들어 주재소 공격에 힘을 보탰다. 이에 합세하여 시위대의 선봉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또 주재소 벽을 파괴하고 공문서 2매 정도를 파손하는 등의 행동에 앞장섰다. 시위대의 공격은 3월 19일 오후 7시경 마무리되었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주재소 건물 전체를 거의 전부 파괴한 후 자진하여 해산하였고, 이에 동참하여 집으로 귀가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공무집행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기물 손괴죄, 공문서 훼기죄, 상해죄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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