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억만
禹億萬1879. 6. 4 ~ 1942. 6.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3.19)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9년 6월 4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리(新里里)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면의 만세운동은 기독교들의 주도 하에 유력 양반들이 협조를 얻어 전개되었다. 영덕면의 만세운동은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강우근(姜佑根)·정규하(丁奎河) 지품면(知品面)의 주명우(朱明宇) 등의 기독교인들이 상호 연락 하에 계획되었다. 김세영은 북장로교 교회의 조사(助事)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가던 중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하였다. 이에 김세영은 영덕에서도 만세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평양행을 포기하고 영덕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12일 김세영은 평소 친분이 있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의 상황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영덕에서 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권태원은 이를 수락하였고 영덕 각지의 기독교인들과 연락을 취하여 상황을 설명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창수면의 시위에 앞서 전날인 18일에는 영해면(寧海面) 장날에 성내시장에서 2,000명 이상이 운집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창수면에도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창수면에서 독자적 시위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면 삼계동(三溪洞)과 오촌동(梧村洞)에서 영해시위에 참가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서 영해로 이동을 하였다. 이들은 이동하던 중에 영해에 시위에 합류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게 되자 이들은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에 참여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신기동(新基洞)의 경우 일제에 강제로 땅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많았던 관계로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기동의 구장 이현설(李鉉卨)의 주도 하에 주민들이 몰려들어 시위대는 150여 명까지 늘어났다. 같은 날 오후 4시 창수동에 이르렀을 때는 시위대가 200명을 상회하였다. 이들은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주재소로 들어가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후 주재소 시설을 파괴하는 등 시위는 가열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구장인 이현설과 이수각(李壽珏)은 주재소에 침입하는 군중을 지휘하였다. 시위 군중은 주재소 건물과 객사, 주임순사의 숙사의 벽, 천장, 건물 내에 있던 공문서를 파기하고 물품도 파괴하였다. 이어 같은 마을인 오용이, 이강복, 박석문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 숨겨두었던 주임순사 타카기 산로(高木伊三郞) 소유의 물건(黑七子袷羽織) 2매와 물품 225종, 순사보 소유의 서적, 순사보 권찬규, 순사보 김경수 소유의 물건을 파손하였다. 독립을 위한 시위의 취지에 찬동하여 창수면 창수동(蒼水洞)에 있는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의 200~400여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위를 하였다. 이때 앞장서서 주재소에 침입하여 청사시설에 손해를 입혔으며 주재소에서 사용하는 문서를 훼손시켰다. 이로 인해 붙잡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공무집행방해죄·건조물 손괴죄·기물 손괴죄·공문서 훼기죄·상해죄·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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