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응봉
禹應鳳1894. 6. 17 ~ 1941. 7.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독립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신천군 초리면 장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894년 6월 17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초리면(草里面) 월산리(月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1일 신천군 문화면(文化面) 장터 만세시위와 3월 15일 초리면 장터 시위와 3월 20일 초리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 측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황해도 신천군 만세시위는 주로 천도교 인사들과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2일 신천 천도교구장 최흥숙(崔興淑)은 인편을 통해서 송화군(松禾郡) 천도교구장 손두순(孫斗淳)에게 3월 1일 발발한 만세운동의 취지를 전달하였다. 같은 달 7일 최흥숙은 최운학(崔雲鶴)·이윤식(李允植)·최운룡(崔雲龍) 등과 함께 모임을 갖고 같은 달 11일 신천군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참석자들 사이에 만세시위 추진과 관련해서 이견이 발생한 관계로 3월 11일 만세시위는 실행되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10일 문창규(文昌奎)·최효식(崔孝植) 등이 문화면에서, 다음날인 3월 11일 교회 조사(助事) 최현식(崔賢植), 포목상 강성모(康成模), 잡화상 강영탁(康榮鐸) 등이 같은 면에서, 3월 14일 김명성(金鳴聲)·이영희(李泳禧)가 문화면 동각리(東閣里, 현 건산리)의 문화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서 일어난 3월 15일 초리면 달천시장(達泉市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월산리에 거주하는 우희제(禹禧濟), 교회 조사 황치헌(黃致憲)과 함께 달천시장의 장날이 열리는 3월 15일에 만세시위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유근혁(柳根赫)과 함께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며, 황치헌은 우철희(禹哲禧)의 집에서 독립만세가 쓰여진 깃발을 제작하였다. 3월 14일 황치헌은 은율군(殷栗郡) 은율면(殷栗面) 홍문리(紅門里)에 거주하는 홍진범(洪鎭範)을 통해서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國民會報)를 각각 200장을 받았다. 같은 날인 3월 15일 달천시장에서 정도원(鄭道源)에게 태극기 10기를 주면서 군중들에게 배포하도록 했으며, 서광주(徐光周)는 깃발을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우희제·황치헌 등과 함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한 후, 3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었다. 일본 헌병은 시위를 탄압하는 한편 시위에 참여한 인사 9명을 연행하였다. 일본 군경에 연행되지 않은 우희제·우연제(禹連濟) 등과 함께 추가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0일 기독교인 50~8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달천리에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일본 군경은 시위에 참여한 8명을 잡아갔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초리면 장터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일본의 압제에 대한 부당함과 세계의 공법으로 정의와 인도로써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동양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면서 다시 상고하였다. 하지만 그 해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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