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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斗煥

斗煥

1877. 12. 1 ~ 196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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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劉斗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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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순천(順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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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포상 정보

  • · 애족장(1998)

관련 사건

  • · 순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8) 1877년 12월 1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川郡) 신창면(新倉面) 용승리(龍昇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희간(金喜侃)·김병현(金喜侃) 등과 함께 서울 남대문 상동교회 예배실로 향하였다. 을사늑약에 반대하기 위해 모인 전국 청년회 회원 30여 명과 5명씩 조를 이루어 대한문 앞에서 계속해서 상소문을 올려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인에게 호소하였다. 이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신창면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한 뒤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7년 서울 냉천동(冷泉洞)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졸업 후 운산면(雲山面)에 소재한 운산교회의 목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2월 28일 감리교회 소속 교인이었던 박창빈(朴昌彬)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감리교회 담임 목사인 이윤영에게 전달하였고, 곧 서울과 평양에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전개될 예정임을 알렸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고무되어 신창면에서도 호응하여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지역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을 모아 거사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평소 친분이 깊은 이윤영으로부터 신창면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듣게 되었다. 민족 독립의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황경환(黃慶煥)·유경운(劉景雲) 등과 모여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거사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다. 그 결과 3월 5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신창면 면장인 김삼봉(金三鳳) 마저 설득하여 거사의 중요 동지로 가담시켰다. 1919년 3월 5일 오전 10시경 면사무소 앞 광장에 시위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군중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연설을 마친 뒤 군중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마지막 순서로 ‘독립만세’를 3번 제창하였다. 그 후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자 대열을 갖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장을 보려고 나왔던 사람들이 모두 합세하여 3,500명이 넘는 군중이 거리를 행진하였고, 이때 시위대와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이어나갔다. 시위대가 거리를 한 바퀴 돌아서 광장으로 다시 돌아왔을때,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들에 의해 시위의 주도자들이 대거 검거되었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다행히 자리를 피하여 경찰에 붙잡히지 않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이후 만주 통화현(通化縣)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와 긴밀하게 연락을 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가던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평양(平壤)에서 목회 활동에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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