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운
安泰雲1902. 3. 22 ~ 1969. 1.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용정 만세운동
- ·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2년 3월 22일 함경남도 함주군(咸州郡) 주서면(州西面) 풍남리(豊南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안홍한(安弘翰)을 사용하였다. 만주로 이주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주 후에는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거주하였다. 1919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용정까지 알려지게 되며 3월 13일 대규모의 만세시위가 진행되었다. 이때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17일 동안 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풀려난 후 1920년 일본인 상인의 제품을 사지 말자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붙잡혀 1주일간 구속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할 목적으로 상하이(上海)로 이동하였다.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시점은 확인할 수 없으나 의열단(義烈團) 단원인 김상옥(金相玉)과 만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11월 14일에는 상하이에서 펑톈(奉天)으로 이동하였으며,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로부터 군자금 15원을 모집하였다. 한편, 상하이에서 독립을 위한 자금 모집 등에 관한 계획이 더욱 구체화 되었다.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金元鳳)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가 폭탄을 사용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하여 독립 기회를 엿볼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서 폭탄을 수송하고 보관하는 역할은 김한(金翰)·이응명(李應明)·남영득(南寧得)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국내로 들어가서 계획을 진행하는 일은 김상옥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하고, 김상옥·오복영(吳福泳)과 상하이에서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방법으로 먼저 서울로 들어가 문서를 배포하고 폭탄과 권총을 사용하여 부호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1922년 11월 중순 김상옥과 함께 권총과 문서가 들어있는 트렁크 형태의 나무상자를 가지고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같은 해 12월 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김상옥과 친분이 있던 전우진(全宇鎭)을 만나 소개를 받아 정설교(鄭卨敎)의 집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12월 1일 저녁, 전우진의 집에서 김상옥·정설교·전우진과 계획의 진행을 논의하였다. 12월 3일 전우진이 트렁크 식 나무상자를 역에서 받아왔으며, 김상옥의 요청에 따라 폭탄을 받기 위해 관수동에 있는 김한의 집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폭탄이 도착하지 않아 계획이 늦어지자, 김상옥은 조선총독부 각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로 결정하고, 자신은 상하이에서 가져온 문서 배포를 맡기로 합의하였다. 1922년 12월 28일 문서 배포를 위해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로 잠입하였다. 하지만 1923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가 일어났고, 이와 연관된 인물로 주목되어 김한·정설교·윤익중(尹益重)·서병두(徐丙斗)·신화수(申華秀)와 함께 붙잡혔다. 약 4개월간의 조사 후 공판에 넘겨졌다. 한국인 변호사단이 참여한 재판은 당일 새벽부터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경성지방법원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할 정도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23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푸른색 옷을 입고 똑똑하게 답을 하였다”고 재판 상황을 보도하였다. 1923년 5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과 강도예비죄 등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풀려난 이후 다시 북간도로 건너갔고, 광복이 될 때까지 항일활동을 지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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