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달
安鍾達1878. 11. 12 ~ 1929. 3.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8)
관련 사건
- · 파리장서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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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8) 1878년 11월 12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산외면(山外面) 금곡리(金谷里)에서 아버지 안연원(安演遠), 어머니 노상이(盧相而)의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은 구한말 유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과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다. 노상익은 대한제국시기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을 지내다 1910년 국권피탈이 된 후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서간도로 망명해 한인촌을 조성해 한인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노상직은 창녕(昌寧)과 밀양 등지에서 강학활동을 하다가 국권피탈 이후 형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귀국후 2년 뒤에 밀양 단장면(丹場面) 무릉리(武陵里)에 자암서당(紫岩書堂)을 열었다. 자암서당에서 외숙인 노상익과 강학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42세 되던 해 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유림에서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주도 하에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던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되었다. 김창숙이 경상북도 성주(星州)에서 소눌 노상직을 찾아 밀양으로 왔을 때 소눌의 제자 13명을 규합하여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였다. 한편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임한주(林翰周) 등이 독립청원서를 작성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독립청원서를 위해 유림이 통합되었다. 이로써 일제의 한국 국권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동시에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고자 유림대표 137명이 연명하였는데, 당시 외숙 노상직과 함께 참여하였다. 김창숙은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이동녕(李東寧) 등을 만나 국내외 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또한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해 파리행을 상의하였으나 여비 및 통역 등 여건이 여의치 않다는 권고를 받아들여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독립청원서는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파리에 가 있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한문으로 3,000부와 영문으로 2,000부가 인쇄되어 유럽, 중국, 국내로 발송되었다. 4월 2일 성주 장날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장석영 등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4월 18일 곽종석을 비롯해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6월에 들어서 상하이에서 발송된 독립청원서가 국내 향교로 배송되면서 137명의 연명자가 알려졌다. 이에 사제(師弟)와 함께 헌병주재소에 붙잡혀갔다. 옥중에서도 “망국의 선비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도리를 잊지 말자”며 사제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일제 고등경찰에 ‘요시찰 인물’로 등록되어 감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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