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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일

元容一

186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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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원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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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강동(江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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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4)

관련 사건

  • · 강동군 강동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4)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동서리(東西里, 현 평양시 강동군 대성리) 출신이다. 일제 측 자료를 보면 1919년 당시 51세로 1869년생으로 추정된다. 향리에서 서당의 교사로 활동하던 1919년 3월 30~31일 강동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을 시작한 7개 도시 중 하나인 평양과 지역적으로 가깝고,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강동군에서는 3월 초부터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강동군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7일 원탄면(元灘面)·고천면(高泉面)에서 처음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한 이래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강동 읍내에서는 3월 30일과 31일에 격렬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동찬(李東贊) 등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소 향리에서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자원 수탈에 분노하고 있었는데,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포한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으로 찬성하고 있었다. 3월 29일 천도교도 이동찬으로부터 3월 30일부터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이니 동참하라는 권유를 받고, 이에 동의하여 3월 30일과 31일 양일 간 전개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30일 오전 읍내 및 부근에 사는 천도교도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400여 명이 집합하여 태극기와 천도교의 궁을기(弓乙旗)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가를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군청, 면사무소, 헌병대 앞 등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만세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만세시위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31일에는 전날의 시위에 자극받은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결합하였다.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천도교도들과 함께 인근의 주민들이 합세하여 1,000여 명 규모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의 시위에서 주민들은 전날과 같이 일제 경찰의 무력에 일방적으로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 일제 경찰로부터의 자위를 위한 낫과 호미, 몽둥이 등을 들고 나왔다. 이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전날에 이어 더욱 큰 규모의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읍내에서 경계 중에 있던 보병부대와 헌병대, 경찰들을 모두 출동시켜 만세시위에 대응하였다. 총검을 겨누고 만세시위의 즉각 해산을 요구하는 일제 경찰 및 군대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이동찬 등과 함께 만세시위의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붙잡혔다. 이날 일제에 체포된 인원은 무려 300여 명이었다. 일제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도 주요 인물로 파악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1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도 이유 없음으로 기각되어 징역 1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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