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달승
嚴達昇1900. 2. 2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천마산대
- · 참의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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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1900년 2월 29일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북면(北面) 관대리(館垈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엄달승(嚴達承)과 엄달원(嚴達元)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1922년 (음)5월경 중국 펑톈성(奉天省) 환런현(桓仁縣) 상루하(上漏河)에서 활동하던 천마산대(天麻山隊)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이들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거쳐 참의부(參議府)로 가세하였을 때에도 참여하였다. 천마산대는 천마대(天麻隊)로도 불리며, 1920년 3월경 의주군(義州郡)의 고령삭면(古嶺朔面)의 천마산을 거점으로 최시흥(崔時興)·최지풍(崔志豊) 등이 구 대한제국 출신 군인을 중심으로 결성한 무장독립단체이다. 500여 명의 인원을 바탕으로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재소의 습격, 친일파의 처단, 군자금 모집 등을 평안도 일대에서 시행하였으나, 일제의 공격으로 인해 1920년 말에는 만주로 이동하여 지린성(吉林省) 콴뎬현(寬甸縣)·지안현(集安縣)으로 본거지를 옳기고 국내진공작전과 요원의 침투 등을 실시하였다. 이에 최지풍의 지시를 받아 허신호(許信浩)·김준언(金俊彦)·이창호(李昌浩) 등 4인과 함께 국내에 들어가 주재소 공격과 군자금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음)6월 동료 6인과 함께 희천군 동면(東面)의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여 경관들과 30여 분의 교전을 수행하다가 후퇴하였다. 1922년 여름에는 희천군 희천면(熙川面) 나삼동(羅三洞)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음)7월경에는 희천군 서면(西面) 평원동(平院洞)에서, 1924년 여름에는 희천면 가라지동(加羅之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군자금 모집을 거절하는 인원에 대해서는 전소 등으로 처분하여 군자금 모집을 용이하게 하고자 하였다. 한편 천마산대는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을 거쳐 남만주 일대 독립운동 조직의 통합 움직임이 활성화되던 1922년 8월에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자 천마산대 역시 참여·합류하여 통의부의 제3중대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1923년 2월경 복벽주의(復辟主義)와 공화주의(共和主義)의 정치적 지향의 차이로 의군부(義軍府)로 복벽주의 세력이 이탈하자, 통의부 내에서도 정치적 지향의 차이 속에서 중립을 지키는 세력이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가를 얻어 새로운 독립군단을 편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1924년 6월경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계열의 제1중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계열의 제2중대와 천마산대 중심의 제3중대, 의병단(義兵團) 계열의 제5중대가 기존 통의부로부터 이탈하여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였다. 이에 참의부에 가담하여 다시 국내로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참의부 결성 후에도 희천군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1922년 (음)5월부터 1925년 10월 13일까지 4인의 동료와 함께 희천군 내에서 10여 차례 활동을 전개하면서 500~600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5년 11월 25일 안창제(安昌濟)등 3인의 동료와 함께 희천군 동면(東面)에 거주하는 이윤용(李允用)이 일제 경찰에게 고발 행위를 하자 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이 일제 측에 의해 탐지되어 끝내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1928년 12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았으나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 1929년 1월 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경성형무소로 옮겨져 옥고를 겪었다. 이후 1937년 3월 21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이후의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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