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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相基

相基

1883. 10. 10 ~ 1910.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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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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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산(光山)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광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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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제국군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양상기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3년 10월 10일 전라남도 광산군(光山郡) 서창면(西倉面) 벽진리(碧津里, 현 광주광역시 서구 벽진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 당시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서양면(瑞陽面) 니동(泥洞, 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 거주하였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호는 설죽(雪竹)이다. 의병장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의 아들로서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부친 양진여는 주막업을 하던 평민 출신 의병장이나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인물이었으며, 부친이 세운 풍암정(楓岩亭)에서 병서와 무예를 배우며 자랐다. 성장하여 대한제국 군대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후 광주경찰서 순사로 보직이 옮겨졌다. 1907년 10월 부친 양진여는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광주·담양(潭陽)·장성(長城) 일대에 격문을 살포하여 30여 명의 동지를 모은 뒤, 광주와 담양 경계에 있는 대치산을 근거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23일 아버지가 의병장임이 드러나 순사직에서 파직 당하였다. 1908년 5월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80여 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도통장에 안판구(安判九), 후군장에 이문거(李文擧), 포군장에 안영숙(安永淑), 도선봉장에 조사윤(曺士允), 참모장에 유병기(劉秉基) 등의 참모진을 갖추었다. 또한 단발양총 2정(挺), 천보총 4정, 화승총 20정, 양도(洋刀) 3정 등으로 무장하였다. 이후 광주군·동복군(同福郡, 현 화순군 동복면)·담양군·창평군(昌平郡, 현 담양군 창평면) 등 주변 일대를 돌며 군자금 모금과 밀고자 및 일진회원 처단, 일제 헌병분견소 습격 등의 의병 활동을 하였다. 곧 1908년 11월 아버지 양진여가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으로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수비대와 접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2월 9일 3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담양군 우산면(牛山面) 신기리(新基里, 현 담양읍 백동리)에 거주하는 안판구(安判九)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 날 다른 일부는 창평군 지곡리(芝谷里, 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거주하는 동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9년 2월 26일 동복군 외남면(外南面) 동천리(東川里, 현 화순군 사평면 부근)에서 다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 달 담양군에서 서기 한응길(韓應吉)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4월 26일 광주군 대치면(大峙面) 본촌(本村, 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사는 이씨에게 이씨 소유의 가옥인 쌍계당(雙溪堂)을 일본 헌병대에 빌려준 것은 잘못이라고 꾸짖고 가옥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같은 달 동복군 서촌(西村, 현 화순군 이서면 서리) 전투에서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그 해 5월 담양군 무정면(武貞面) 덕곡리(德谷里) 전투에서는 23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기도 하는 등, 점점 의병활동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09년 12월 전남 남원군(南原郡) 통한방(通漢坊) 동도리(東道里, 현 남원시 도통동)에서 남원경찰서 순사에게 붙잡혔다. 붙잡힌 후 받은 조사에서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본인을 한국의 관리 또는 거류민으로 속속 들여보내어 끝내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하고 있으며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여 한국을 탈취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인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이었다.”고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이야기하였다. 이어서 귀순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는 “귀순할 뜻은 추호도 없으며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살아날 수 있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제침략자와 싸우겠다.”며 철저한 항일의지를 밝혔다. 결국 재판에 넘겨져 1910년 3월 29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강도죄·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5월 1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8월 1일 대구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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