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起鐸
起鐸1871. 4. 2 ~ 1938. 4.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독립협회
- · 신민회
- · 대한광복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
- · 고려혁명당
- · 한국독립당
- · 민족혁명당
- · 조선혁명당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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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1962) 1871년 4월 2일 평안남도 평양(平壤) 소천(小川)에서 부친 양시영(梁時英)과 모친 인동 장씨(仁同 張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본적지인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쌍룡면(雙龍面) 신경리(新慶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명은 의종(宜鍾)이고, 자는 자명(子明), 호는 우강(雩崗), 필명은 우강(于岡)·우강인(于岡人)·우강산인(于岡散人) 등이다. 부친 양시영은 지역에서 이름난 한학자이자, 서양 문물 수용에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어린 시절 학문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상당한 한문 실력과 함께 일찍이 영어를 습득하여 능통할 수 있었다. 1892년경부터 부친과 함께 게일(T. S. Gale)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돕기도 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899년 1월경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구속되었다. 옥중에서 이승만 등과 옥중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1903년 3월 풀려난 후, 미국인이 운영하던 한성전기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04년 3월 궁내부(宮內府) 산하 예식원(禮式院)의 번역관보(飜譯官補)에 임명되어 1905년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예식원에 근무하던 1904년 7월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으며, 발간 일체를 관장하는 총관리인으로 실제적인 운영을 맡았다. 창간 초기에는 예식원과 신문 업무를 겸직하였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예식원을 사직하고 신문 업무에 전념하였다. 또한 당대 제일의 논객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를 초빙하여 항일 논설과 기사를 게재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확산되자, ‘의병소식’, ‘의병상보’ 등 의병에 대한 고정 지면을 정해 놓고 이들의 활동을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 당시 순절한 민영환(閔泳煥) 등의 자결을 추앙하는 글을 게재하여 민중의 애국심 고취와 의협심을 북돋기도 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회장 김광제(金光濟)와 부회장 서상돈(徐相敦) 등이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를 발표하자, 이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만들고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사무소를 설치한 후 검사원에 선임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관하였다. 신문사가 직접 국채보상의연금을 모금하였으며, 지면을 할애하여 의연자의 성명과 액수를 일일이 게재하기도 하였다. 1908년 4월까지 대한매일신보사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서 모은 의연금은 15만 원에 달했다. 1908년 7월 12일 일제에 의해 조작된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로 붙잡혔으나, 구금된 지 64일 만인 1908년 9월 25일 무죄로 풀려났다. 이와 함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한자강회·광무사·국문연구소·서우학회 등의 계몽운동단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가뎡잡지』와 『대한학회월보』·『서우』·『서북학회월보』·『공업계』 등 계몽지에 글을 발표하여, 부녀자·아동·청소년을 상대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1907년 4월에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 발기인 모임을 주재하고, 총감독에 선임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으며 신민회의 총본부였다. 안창호 등과 신민회가 주도한 교육, 계몽강연,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이끌었다. 신민회 간부회의를 주재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신민회 간부들의 국외 망명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주도하였다. 1911년 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이 무관학교의 설립 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해 신민회의 존재가 노출되어 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 등 망명 계획을 추진한 인사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을 이유로 재차 재판을 받았다.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모살미수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즉시 항소하여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감형되어 징역 6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931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1915년 2월 풀려난 후, 12월경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망명하였다. 신민회의 핵심 주체로서 독립군 기지개척 계획을 총괄하였으므로, 신민회를 중심으로 해외 각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915년 말부터 안동여관을 거점으로 국내외 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의열투쟁을 지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세금 운송마차를 습격하거나 대구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조선총독 처단을 시도하는 등 활발한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17년 12월에 오주혁(吳周爀)·정안립(鄭安立) 등과 함께 만주지방 동포들의 생계를 증진하고 안정을 꾀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한다는 목적으로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중국인 주사형(朱士衡)이 추진하던 고려국 건립계획에 참여하던 중 톈진(天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중국 재류금지 3년과 거주 제한처분을 받았다. 1920년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앙양을 위한 민족종교인 통천교(統天敎)를 창시하였다. 통천교는 천도교와 시천교·제세교·경천교·청림교·태을교의 6교를 합한 것으로, 태을교를 제외한 5교는 모두 동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표면으로는 종교운동을 내세우고 있으나,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한편 1920년 8월 24일 상하이에 있는 안창호와 연계하여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미국 국회의원 방한단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려다가 발각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22년 1월 서간도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파견한 이관린(李寬麟)·장철호(張喆鎬)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콴뎬현(寬甸縣)에 들어서 각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1922년 5월 25일 펑톈성 환런현(桓仁縣)에서 국민대표회 남만촉성회(國民代表會南滿促成會)가 조직되었는데,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만들어 남만주 지역 전 독립군 단체의 통일을 도모하였다. 1922년 8월초 각 독립군 단체의 통일 및 금후의 방침을 결정할 목적으로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통군부를 비롯하여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관전동로한교민단·대한광복군영·대한정의군영·대한광복군총영·평북독판부 등 이른바 8단 9회의 인사 71명의 모임을 주도하여, 8월 30일 남만주지역 독립군의 통합조직인 통의부(統義府)가 결성되었다. 통의부 결성을 주도한 이후 고문으로 활동하였는데, 통의부는 주로 남만주 한인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을 펼치며 준국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통의부 내부 복벽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편강렬 등 청년 16~17명과 함께 통의부를 탈퇴하여 1923년 8월경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였다. 의성단은 교통 요지인 길장선의 카륜(卡倫)에 본부를 두고 하얼빈(哈爾濱)시 이남 길장 연선, 남만 연선 한인사회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이후 지린(吉林)·창춘(長春) 일대에서 친일 주구배 처단·군자금 모집·일제 관공서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4년 1월 중순 지린에서 남만통일발기주비회를 소집하였는데, 독립운동 단체 대표 3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어서 1924년 3월 하순에는 전만통일회주비회를 결성하였고, 남만주지역 독립군 지도자인 이장녕(李章寧)·지청천(池靑天)·손일민(孫一民) 등을 설득하여 1924년 7월 각 단체의 대표들이 지린에 모여 주비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11월 24일 대한통의부·대한광정단·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노동친목회·의성단·잡륜자치회·고본계 등 8개 단체가 경제와 산업, 교육에 힘쓰고 광복사업에 일로매진하기 위해 대동 통일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정의부는 남만 동서지역의 대표적인 군사단체들을 망라한 최고의 독립군단이었다. 또한 남만지역 한인들의 자치를 위한 민정(民政)과 항일군사활동의 군정(軍政)을 동시에 추진한 군정부(軍政府)의 성격을 지녔다. 한때 정의부의 재무위원에 선임되어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주요 직책을 맡지 않고 원로로서 독립운동단체 간의 통합을 위한 조정 역할을 맡았다. 1926년 2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이상룡(李相龍)이 면직된 후 후임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만주지역 동지들의 뜻을 쫓아 국무령 취임을 거절하였고, 4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무령 선임을 취소하였다.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을 추진하였다. 즉, 천도교 측의 최동희(崔東曦)와 함께 정의부 인사들, 천도교 혁신파인 천도교연합회 계열, 형평사의 대표들, 그리고 소련지역 무장투쟁 세력들을 규합하는 정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1926년 3월 29일 자신의 집에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1926년 4월 5일 지린에서 고려혁명당의 창당을 선포하였다. 이때 위원장에 임명되어 항일 무장투쟁 위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2월 말 이동락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직 전모가 노출됨에 따라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와 함께 1926년 12월 중국 지린성 판스(盤石)에서 정의부·한족노동당·남만청년총동맹의 각 간부들과 유지자들이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者後援會)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민족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동지와 가족에게 정신적, 물질적인 동정과 후원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30년경 지린에서 국민부의 김동삼 등과 한족총연합회와의 합동을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1930년 12월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한 다음에도 안창호·이동녕 등과 국민부와 한족총연합회의 통합을 재차 추진하였다. 1931년 2월에는 김규식(金奎植)·안창호 등과 우리 동포들의 보르네오 집단 이주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윤봉길(尹奉吉)의 홍커우공원 투탄의거 이후 은신하다가 1933년 10월 상하이로 귀환하여 임시정부의 재건에 나섰다. 항저우(杭州)·자싱(嘉興)·난징(南京)·전장(鎭江) 등을 오가기도 하고, 김홍서·문일민 등을 파견하여 동지들을 재규합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1933년 말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인 외아들 양효손(梁孝孫)에게 수차례 밀서를 보내, 독립운동 투사가 부족하므로 일본에서 인물을 물색하여 상하이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이로 인해 양효손은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1933년 12월 30일 전장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송병조(宋秉祚)·윤기섭(尹琦燮)·조소앙(趙素昻)·김규식·최동오(崔東旿)·김철(金澈)·성주식(成周寔)·조성환(曺成煥)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34년 1월 20일 전장에서 소집된 제1회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말에는 군무장도 겸하였다. 그러나 1935년 4월 27일 건강상을 이유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사임원을 제출하였다. 이는 오랜 소망이었던 단일 조직체에 전 민족운동 세력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한 민족대당 결성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35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 난징에서 열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회의에서 신당 창당을 위한 예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예비회의에서 위원장을 맡아 신당 창당을 위한 준비절차를 이끌었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의 5단체와 기타 군소단체 대표자들이 7월 5일 신당 결성식을 거행하고,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나, 민족혁명당에 내분이 일자 탈당하여 1937년 4월 하순 지청천 등과 새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쑤성(江蘇省) 담양현에 있는 암자인 길당암(吉堂庵)으로 은신하였다가, 1938년 4월 19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1998년 국내로 봉환되어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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