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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조

楊宇朝

1897. 3. 29 ~ 1964.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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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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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평양(平壤)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평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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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북미유학생총회
  • · 흥사단
  • · 한국독립당 광동지부
  • · 한국국민당
  • · 한국광복군
  • · 전재동포후원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7년 3월 29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아버지 양기영(楊基永)의 6남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남 중화(中和)이다. 본명은 명진(明鎭)이고, 호는 소벽(少碧)이다. 이명으로 양묵(楊墨), 이춘삼, 영어명은 데이비드 영(David J. Young)이다. 중국에서 양우조(楊宇朝)라는 이름을 본명처럼 사용하였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을 지낸 강명화(姜明化)의 딸인 강영실(姜泳實)과 결혼하였다.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받다가 1912년부터 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17년 중국 상하이(上海)를 경유하여, 그 해 1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다. 이때 대한인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1918년 인디애나(Indiana) 주 사우스벤드(Southbend)의 시립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비를 벌기 위하여 항구·탄광·사탕수수밭 등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동포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하기로 결심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가 방직회사를 설립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며 이를 위해 1924년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의 뉴 베드포드 방직학교(New Bedford Textile School)에 입학하였다. 1920년 4월 6일 미주지역 유학생을 대표하는 학생총회 대회에 시카고 지방 대표로 참여하여 북미한인유학생총회(北美韓人留學生總會) 결성을 이끌었다. 이후 1921년 흥사단(興士團)의 엄격한 단원 선정 과정을 거쳐 흥사단 단원이 되었다. 1927년에 뉴 베드포드 방직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0년 12월 제17회 흥사단 원동대회 설비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화남 및 남양군도 시찰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광동·홍콩·필리핀 등을 방문하고는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광동지부 간부, 중한협회(中韓協會) 한국 측 위원으로 선임되어, 조직을 확대하고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간하여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광주에서 혁신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파시스트란 무엇인가』·『민족주의와 기타주의』 등을 저술하였다. 1934년 1월 제26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중령(中嶺)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5년 10월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제28차 정기의회에서 공석이 된 국무위원을 새로 선출하고 임시정부와 의정원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며, 이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완구(趙琬九)·송병조(宋秉祚)·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였다. 이때 이시영(李始榮)·조성환(曺成煥)과 함께 감사에 선출되었고 이후 항저우와 전장(鎮江) 등을 오가며 임시정부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다. 1937년 12월 임시정부가 이동할 때 창사(長沙)에서 합류하였다. 1938년 3월 안창호(安昌浩)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피난 중임에도 안창호 추도식을 개최하였다. 그 해 7월 임시정부가 창사를 떠나 충칭(重慶)으로 이동할 때까지 임시정부와 함께하였다. 1939년 12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선전위원회가 설립되자, 선전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선전위원회 소속으로 국민들에게 선포문을 발표하여 「독립운동방략」에 협력해달라는 요청과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당부하였다. 1940년 5월 8일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제33회 임시의정원 정기의회에서 엄항섭(嚴恒燮)과 함께 김붕준 의장 탄핵안을 제의하여 가결시켰다. 1942년 3·1절 기념식 준비위원회 의식조원으로 선발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1월 선전위원회 소속으로 「고국내외동포서」를 발표하여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위치를 재인식시키고 민족적 분발을 다짐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6월 「태극국기의 설명」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태극기 양식을 해설하고 통일시켰다. 이 무렵 임시정부 재무부 부원과 생계부 차장을 맡아 임시정부와 한국인 동포의 살림을 관장하였다. 1944년 10월 23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총사령부의 개편이 이루어질 때, 정훈처 훈련과장을 맡았다. 이어 1945년 7월, 한국독립당 제4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뒤, 이듬해인 1946년 5월 귀국하였다. 1946년 전래동포원호회를 조직하여 중앙위원과 사업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 애국동지원호회 이사, 1955년 한중협회 상임이사, 1960년 광복군전우회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구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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