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漢奎
漢奎1844. 10. 20 ~ 1907. 2.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양한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후기의병(양한규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1844년 (음)10월 20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장흥면(長興面) 쌍교리(雙橋里, 현 남원시 쌍교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어려서는 등에 달무늬가 있어서 월서(月瑞)나 일월(日月)로 불렸으며, 초명은 재윤(在潤)이었다. 자는 문찬(文贊)이고, 호는 칙헌(則軒)·우졸헌(愚拙軒)이며, 이명으로 양초계(梁草溪·梁初桂)가 있다. 집안은 고려의 멸망으로 남원에 은거한 묵재(墨齋) 우(祐) 이래 남원에 세거하였다. 고조 여익(與益)은 장낙원정(掌樂院正), 증조 산혁(山奕)은 호조참의, 조부 사준(思濬)은 호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장을 지낸 맹석(孟錫)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로서 종길(宗吉)의 딸이었다. 아내는 운봉(雲峯)의 향리 집안 박문달(朴文達, 일명 鳳陽)의 누이였다. 조부는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난(洪景來亂) 당시 의병을 도모했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없어서 중지하자 사람들이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3대가 추영(追榮)된 것은 부친 맹석의 효성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져서 조정에서 포상을 한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는 훗날 호조판서에 추증되는 특은을 입었으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효성이 지극했는데, 10대 초반 어머니가 위독하자 주야로 기도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했으며 장례를 치른 후에는 3년간 시묘하였다. 동족과의 친목을 중시하고 선산을 수호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해 인근의 칭송이 자자했던 것으로 전한다. 집안은 남원의 이방과 호장 등 유력 향리직을 대대로 세습해오다가 1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무반직을 제수받아 신분 상승에 주력한 듯하다. 조정의 추증으로 인해 국은에 보답해야 할 의무를 각별히 중시했고 성격이 호방하여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베푸는 것을 즐겨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의기가 남달라 일찍부터 신망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 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장정 300명을 모집하여 서울로 올라가 반군을 진압하려다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의 만류로 중지했다고 한다. 향리로 활동하다가 1891년 음력 7월 선략장군행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의 벼슬을 받았으며, 이듬해에 통훈대부 행초계군사(行草溪郡事) 겸 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되었고, 이어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왕실의 거듭된 은혜를 입은 것에 크게 감격하여 반드시 보답하리라 다짐하였다. 3년 후인 1894년 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진압하려 했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중지하였다. 더욱이 7월 27일 동학농민운동의 제2인자였던 김개남(金開南)이 남원에 웅거하여 전라좌도를 사실상 통치하였다. 이미 남원은 동학 조직이 강력하기로 이름난 곳이었는데, 최제우(崔濟愚)가 1861년 말부터 약 반 년간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의 은적암(隱寂庵)에서 머문 인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1889년에 이르러 남원은 동학교인이 수천 명으로 증가하였고,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이들이 김개남에게 적극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 남원은 전라좌도의 핵심 도시로서 영호남을 왕복하거나 전라도의 남북을 오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로서 모이거나 흩어지기가 편리한 지역이었다. 또한 읍성 바로 인근에 군사적 요충지인 교룡산성이 위치한데다 정밀한 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이 남원을 점령할 당시 남원부사 윤병관(尹秉觀)은 이미 도망을 가버려 관아는 텅 빈 상태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김개남 등 6~7만 명의 농민군이 남원에 무혈입성한 것이다. 이 무렵 초계군사에서 물러나 남원에 칩거하며 농민군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원에서 함양(咸陽)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운봉현(雲峯縣)은 해발 700미터 안팎의 고원지대로서 천연적인 요새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처남인 박문달이 이끄는 수성군이 농민군과 호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박문달은 운봉의 향리 집안으로 재산이 많았으며 성품이 모질기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박문달은 농민군이 남원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치자 동학에 가입하여 한달 가량 교인으로 행세하였다. 하지만 곧 동학을 배반하였다. 이후 재산을 풀어 수성군을 조직해서 운봉현 사수에 사활을 걸자, 김개남은 여러 차례 운봉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더욱이 (음)10월 김개남이 북상을 단행하자 박문달은 수성군을 이끌고 남원읍성을 공격, 점령한 바 있다. 김개남이 잠시 남원읍성을 비우자, 남원의 선비 장안택(張安澤)·정태주(鄭泰柱) 등과 함께 운봉의 박문달을 찾아가 남원읍성을 탈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즉 남원읍성 탈환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이 발생한데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복수와 제도의 복구를 다짐하며 가산을 털어 동지를 규합하고 무기를 조달하여 깊은 산중에 감추고서 명산대천에 기도하며 거의(擧義)를 도모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서울에 들어서자 우국지사들과 은밀히 연락하며 정세를 관망하며 국권을 회복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06년 6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贊)이 전북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켜 순창(淳昌)에 주둔하자, 진압에 나선 남원의 진위대에게 교전하지 않도록 조처하며 태인의병 보호에 앞장섰다. 하지만 약 열흘 만에 의병부대는 해산되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 13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최익현이 사람을 보내어 속히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는 편지를 전달하였다. 최익현의 편지가 거의 결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남원을 비롯한 영호남에서 호응한 1천여 명의 의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음)11월 25일 본가에서 남원의 박재홍(朴在洪), 능주의 양열묵(梁列黙), 창평(昌平)의 고광순(高光洵) 등과 상의하였다. 이들은 먼저 남원성을 점령한 후 광주(光州)·나주(羅州)·전주(全州) 등 전라도의 주요 도시와 각 포구를 차례로 점령하여 일제의 침략 기구를 몰아내고 친일 세력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영·호남 각지의 의병세력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운봉의 박문달과 함께 지리산에 근거지를 구축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음)12월 28일에는 고광순, 포천의 정언(正言) 이응천(李應天), 조규현(趙圭鉉) 등이 다시 모여 거의에 관한 사항을 점검하였다. 이때 고광순은 조총 20정을 보유한 20여 명을 인솔하기로 결정되었다. 진사 박재홍과 참봉 유병두(柳秉斗) 그리고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과 더불어 남원의병을 결성했다. 이때 화승총 16정과 죽창을 소지한 7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였으며,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들은 이미 약속한대로 남원읍성을 먼저 점령하기로 했으며, 거사일을 섣달 그믐날인 1907년 2월 12일로 잡았다. 남원 진위대의 상당수 장병들이 설날 차례를 지내기 위해 휴가를 가므로 읍내 주둔하는 병력이 많지 않다는 점과 일제 군경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2월 12일 남원의병 100여 명은 남원 외곽 10리 지점의 진목정(眞木亭) 주막에 집결했다. 이들은 첫닭이 우는 소리를 신호삼아 새벽 2시를 전후하여 선봉장 이응천의 지휘에 따라 광한루(廣寒樓)에 위치한 진위대와 우편소를 차례로 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경부(警部) 1명이 부상당해 도주하였다. 사기가 오른 의병들은 사방으로 내달려 4개 성문을 지키며 어지러이 총을 발사했는데, 1907년 2월 13일 새벽 순시를 하던 중 갑자기 날아든 유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의병들에게, “나는 곧 죽습니다. 국사가 망극하니 여러분은 힘써 싸우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마치고 사망하였다. 손에 칼을 쥔 채 죽었으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유족들은 3일 만에 시신을 거두어 관도(官道) 근처에 매장했으나 열흘이 지난 후 전주의 일본군이 출동하여 묘지를 파서 시신을 재확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까지도 얼굴이 살아있는 듯해서 사람들을 쏘아보는 노기를 띤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일본군은 그 시신의 상태를 촬영한 후 돌아갔고, 훗날 교룡산성 북쪽에 안장되었다. 한편, 의병장의 죽음을 알아챈 적들이 되돌아와 공격하자 대장을 잃은 의병들은 일시에 사기가 꺾였다. 노획한 총과 탄환 등을 수레에 나누어 싣고 남원 주포방(周布坊)까지 이동하던 중 일본군의 추격을 당해 사분오열 퇴각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새벽에 도착한 창평의 고광순 의병부대는 이미 경계가 삼엄한 남원성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가 되돌아갔다. 날이 밝자 남원에 급파된 일제 군경은 의병 관련자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여 감옥이 넘쳐날 정도였다. 이때 박재홍·양문순·조규현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다가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1907년 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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