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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문

安喜文

1898. 4. 21 ~ 1979.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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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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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진위(振威)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진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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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청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8년 4월 21일 경기도 진위군(振威郡, 현 평택시) 오성면(梧城面) 안화리(安化里)에서 태어났다. 안광일(安光日)이라는 이명이 있다. 고향에서 한문(漢文)을 수학한 후 한성실업학교(漢城實業學校)에 진학하여 그곳을 졸업했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1일 진위군 청북면(淸北面) 백봉리(栢峯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검거가 시작되자 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인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로 피신하였다.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에서는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안육만(安六萬)과 김원근(金元根)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19년 4월 1일 진위군 청북면 백봉리에서 주민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가? 빨리 나와서 부르라”라고 큰 소리로 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위와 같은 만세운동 참여 독려에 호응하여 최만화(崔晩華)·황순태(黃順泰)·정수만(鄭水萬)·홍기성(洪奇成)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이외에 마을 주민 수십 명도 합류하여 다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만세운동은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근거한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1심과 2심의 유죄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이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서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21일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도 30여 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출옥 이후 고문 휴유증으로 인해 하반신 마비라는 고초를 겪었으나 굳건한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농촌계몽 기독교인 봉사단원,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중앙위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6·25전쟁 후에는 기독교 구호사업 회원으로 봉사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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