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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鳳植

鳳植

1882. 6. 3 ~ 195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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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梁鳳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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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永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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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학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2년 6월 3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봉소리(鳳韶里)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고 전한다. 1908년 이강년 의병장 사망 이후 중국 서간도(西間島) 지역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12년 간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2월 귀국하여 4월 3일 영동군 학산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서간도에서 진남포(鎭南浦)로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중 3월 1일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에 이미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립선언서 수십 장을 구하여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귀향하였다. 영동군 학산면에서는 1919년 3월 29일의 첫 만세시위가 일어난 후 4월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의 노동력 수탈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이 폭발하여 여러 차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격렬한 양상으로까지 표출되었다. 특히 뽕나무 묘목 강제 배부를 비롯하여, 소백산맥(小白山脈)과 금강(錦江)을 가로질러 험준한 산악 지대인 영동과 전북 무주(茂朱)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도로 공사에 대한 강제 노동력 수탈은 사망과 부상 위험이 높아 주민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일제의 수탈이었다. 귀향 직후부터 이기영(李璣榮)·정해용(鄭海容)·전재득(全在得) 등을 만세운동 동지로 모으는 한편, 독립선언서의 일부를 옥천(沃川)·이원(李院)·무주(茂朱)·금산(錦山) 등 주변의 다른 지역에도 배포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3일 오후 4시경 이기영·전재득 등과 함께 면소재지인 서산리(鋤山里)의 호미실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장터에 나온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하여 참여한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장터의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그 날 오후 8시경 약 3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 자리에서 “바야흐로 지금은 주민이 조밥을 먹기도 힘든 때에 비싼 뽕나무 묘목을 강제 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한 처사이니 이것을 처분하자”고 주장하였다. 시위대가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동의함에, 시위대와 같이 면사무소 구내에 임시로 심어 놓은 뽕나무 묘목 약 2만 8천 그루를 뽑아 버리고, 그 중 상당수를 불에 태웠다. 이후 만세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순사주재소로 행진하면서, 주재소에 대한 습격을 지휘하며 순사주재소의 사무실과 숙직실의 집기, 비품류를 모두 파괴하였다. 시위 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8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같은 해 7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고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재차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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