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信集
信集1882. 4. 29 ~ 1948. 7.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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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882년 4월 29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장연면(長延面) 오가리(五佳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김의현(金義玄)·김의대(金義大) 등과 함께 1919년 4월 장연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연면에서는 고향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쓰던 김의현·김의대 형제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준비되었다. 1919년 3월 3일의 고종(高宗)의 장례식에 참례할 봉도단(奉悼團)에 가입한 김의현은 동생 김의대와 함께 수제자인 박영래(朴泳來)를 대동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들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던 중 당시 전개되고 있던 서울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이에 크게 공감하여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생각으로 귀향하였다. 김의현과 김의대로부터 서울 만세운동 상황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만세운동을 함께 일으킬 것을 제의받았다.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김일곤(金日坤)·정해문(鄭海文)·지민수(池敏洙) 등 동지들과 뜻을 모아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동지들과 협의하여 1919년 4월 1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결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태극기 수백 장을 제작하고 준비하였다. 거사날인 4월 1일, 김의대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찬성하여 시위에 동참한 100여 명의 오가리 주민들을 모아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일제 지역 통치의 상징인 면사무소 건물을 일부 파괴하고 해산하였다. 이날 밤 김의현과 김의대의 회의소집 통보를 받고, 김의현의 집으로 갔다. 모인 인물들은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동지들로 30여 명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김의대는 다음날인 4월 2일 밤에 다시 한번 면사무소를 공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의견을 받은 김의현은 “4월 2일 밤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예정이다. 만일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그 마을을 파괴하겠다”는 내용의 통문(通文)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김의현의 지도에 따라 이 통문을 장연면 내 추점리(楸店里)·광진리(廣陳里)·방곡리(方谷里)·조곡리(鳥谷里) 등 각 마을에 회람시켜 만세운동에 대한 동참을 독려하였다. 4월 2일 밤 김의현·김의대 등과 함께 주민 300여 명을 집결하여 면사무소 습격을 위해 모였다. 김의현의 지휘 아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사무소를 공격하며 건물을 파괴하고, 각종 기구·집기·장부들을 파손시켰다. 또 『민적부(民籍簿)』 9권을 제외한 모든 서류를 찢어버렸고, 면장의 사택도 파괴하였다. 이로 인해 이날,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일제 헌병과 연풍면(延豊面) 주둔 보병파견대에 붙잡혔다. 일제 경찰의 조사를 받고 만세시위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5월 8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죄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아 징역 6월로 감형되었다. 제2심 판결에도 승복할 수 없어서 상고하였으나,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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