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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在瑛

在瑛

1887. 12. 10 ~ 1955.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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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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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장단(長湍)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장단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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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진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87년 12월 10일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현 북한 개성직할시), 진남면(津南面, 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東場里)에서 출생하였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월 일어난 진남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이 「조선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 이후 서울에서부터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창영(李昶永)·강규수(姜奎秀)·정순만(鄭順萬)·한기동(韓基東)·백태산(白泰山)·조진행(趙秦行)·이성구(李聲九)·정종락(鄭鍾樂) 등과 함께접하였다. 이에 이들 동지들과 결의하여 진남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해 3월 23일 일어난 진남면 만세시위는 장단군 내 최초의 만세시위였으며, 3월 26일 만세시위는 진남면에서 일어난 두 번째 시위로 이때부터 장단군 만세운동이 본격화되었다. 3월 26일 밤, 이창영·강규수 등과 함께 동장리에 소재한 사립 성화학교(聖化學校) 뒤에서 100여 명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한동안 “조선독립만세” 구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의 사기를 올린 뒤, 이창영은 “만세만 불러서는 별 수 없었으니 이제부터 이 마을 소재 진남면 면사무소로 몰려가야 한다”고 시위대에 제의하였다. 이에 시위대 전체가 동의함에 따라 이창영·강규수·한기동·정순만 등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하지만 만세시위 발생 소식과 시위대가 면사무소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면장 이하 면사무소 직원들이 곧바로 도망가는 바람에 만세시위대가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면사무소가 비어있는 것에 분노한 이창영과 강규수는 곤봉을 휘저으며 큰 목소리로 “면장을 죽이자. 면사무소를 파괴하자”고 외쳤다. 이어 이창영이 솔선하여 가지고 있던 곤봉을 휘둘러 면사무소의 장지문을 파괴했고, 강규수·한기동·정순만 등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백태산·조진행·이성구 등과 함께 다른 주민들에게도 면사무소 습격을 종용하면서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결과 면사무소 현관 입구 유리문과 문등(門燈)의 유리 등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6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2심 판결에도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28일 칙령 제120호에 의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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