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학
楊在學1868. 7. 10 ~ 1935. 10.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병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6) 1868년 7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에 3월 영해면과 병곡면(柄谷面)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간 만세운동은 영덕지방에서도 일어났는데 영덕군 만세시위는 김세영(金世榮)이 준비하며 시작하였다. 김세영은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북장리교 교회 조사(助事)였는데,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중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목격하였다. 이어 평양행을 포기하고 귀향하여 평소 친분이 두터운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시위에 대해 설명하고는 영덕에도 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권태원은 이를 수락하였고 영해지역 만세시위를 추진하고자 병천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만나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였다. 이들은 기독교도를 모으면서 대표적인 유림세력과도 접촉하였다. 또 권태원은 친척인 권씨 일가와도 접촉하였으며, 창수면(蒼水面) 인량동(仁良洞)·오촌동(梧村洞)과 영해면 원구동(元邱洞)의 유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장날인 3월 18일에 영해 성내(城內)시장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월 17일 영해로 심부름을 가던 중 만난 서삼진(徐三辰)을 통해 3월 18일에 영해시장에서 독립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한국독립에 찬성하여 시위에 나아가기로 결심하였다. 3월 18일 정오경에 정규하 등이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안고 시장으로 진입하였고, 오후 1시에 태극기가 등장하면서 시장 내에는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다. 2,000~3,000명에 육박하는 군중이 이에 호응하였고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이때 영해주재소 문 앞까지 들어가 만세를 불렀고 이어 시위대와 함께 열을 지어서 영해읍내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영덕시장 시위는 3월 18일 2시에 병곡면으로 번졌고, 다음날 창수면 만세시위에 발단이 되었다. 이를 진압하고자 3월 19일 포항과 대구에서 일제 헌병대와 일본군이 급파되어 시위대는 진압되었다. 이때 만세를 외친 시위대와 함께 붙잡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소요죄·상해죄·공무집행방해죄·건조물손괴죄·기물손괴죄·공문서 훼기죄 등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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