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주태
嚴柱泰1900. 10. 18 ~ 1928. 11.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양산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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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0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양산면(梁山面) 중부동(中部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3월 27일 양산면 양산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군 동래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왔다. 다음날인 14일, 전날 시위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전단지 등을 들고 양산공립보통학교로 가서 전병건(全秉健)을 만나 양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의하였다. 3월 15일에는 전병건과 함께 독립선언서 5장을 복사한 뒤 박삼도(朴三道)·이기주(李基珠) 등을 찾아가 만세시위 참가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전병건과 양산 장날인 3월 2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7일 전병건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양산군청으로 가지고 가서 사환 정주봉(鄭周奉)에게 부탁하여 50장을 등사하였다. 또한 3월 25일에는 정주봉에게 양산군청의 등사판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게 한 후 독립선언서 200장과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큰 깃발도 제작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 반쯤 주도자 5명과 함께 양산장터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 등을 주민들에게 배부하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고 장터를 돌아다니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은 시위대 해산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붙잡혔다. 이에 분노한 군중은 농악을 울리면서 양산 양산헌병분견소와 군청으로 몰려가서 항의하였다. 이때 부산 헌병분대에서 군인 12명이 급파되었다. 일제 헌병은 실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헌병분견소대장에 의해 붙잡혔던 다른 사람들과 같이 풀려났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양산 헌병분견소에 의해서 다시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대구감옥에서 약 2년 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지역사회에서 활동하였다. 양산청년회에 참여하여 체육부장을 지냈고 1926년에는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경상남도 청년단체에도 참가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개최된 경상남도 청년연맹 발기준비위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가하였으며, 다음날 열린 발기총회에서는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언론·출판계에서도 활동하였는데, 조선일보 양산지국장을 역임하며 1925년에 개최된 조선기자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사상을 표방한 잡지 『해방운동』의 속간호 발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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