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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진영

嚴進永

1899. 3. 30 ~ 1947.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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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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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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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동래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3월 30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칠산동(漆山洞,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군 동래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 학생으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였다. 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김인호(金仁浩) 등과 함께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福泉洞)에 있는 자택과 2학년 이한주(李漢周)·백정기(白正基) 등의 자취방을 돌아다니며 동래고등보통학교 다른 학년 학생들과 수차례 만세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정오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학교의 창고와 이한주의 자취방 등지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500부 인쇄하였으며, ‘오왕독살(吾王毒殺)’이라고 쓴 전단지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계획대로 두 분대로 나누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제1대 지휘를 맡아 동래군청 앞 망미루(望美樓)로 모였다. 제2대는 김귀룡의 지휘로 동래읍성 남문(南門) 부근에 집결하였다. 오후 2시 망미루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모여드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일제 경찰이 붙잡으려고 하자 서둘러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학생들과 장날에 모인 일반 주민들도 호응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후 시위대는 동래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제 기마 경찰과 일본군에 의해 22명의 학생들과 같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지역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래청년연맹을 해체하고 1928년 2월 27일 창립된 동래청년동맹 조직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신간회 동래지회 창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8년 3월 26일 개최된 신간회 동래지회 설치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에는 신간회 동래지회 조직선전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한편 동래에서 결성된 사상단체인 동래혁파회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대에는 조선일보, 중외일보, 동아일보 3지국의 발기로 1930년 1월 4일 결성된 동래기자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의 만행을 보고 이를 구타하였다가 다른 동래기자단원과 함께 붙잡혀 2월 28일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4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력취체규칙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도 동래체육회, 동래 일신여학교 재단조성기성회 등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남지부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1947년 6월 26일 테러범에 의해 자택에서 암살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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