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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金道鉉

1852. 7. 14 ~ (음)191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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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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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英陽)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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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52년 7월 14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청기면(靑杞面) 상청동(上靑洞)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통사랑(通仕郞) 소경원(昭慶園) 참봉(參奉)을 지낸 성하(性河)이며, 모친은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자는 명옥(明玉), 호는 벽산(碧山), 이명은 김도현(金燾鉉)이다. 시조 김시흥(金時興)의 23세손이고, 사육신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이며, 선조 때 정3품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김응상(金應祥)의 11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조부 괴암(槐岩) 김하술(金夏述)의 괴암서원(槐岩書院)에서 공부하였다. 1882년 31세에 과거를 보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간신들이 권력을 농락하는 모습을 보고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 독서와 사색을 즐겼다. 『퇴계선생집』을 구해 읽은 것도 이 무렵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이웃 마을까지 쳐들어오자, 이를 막을 병사들을 훈련시키려고 ‘점고지회(點考之會)’를 설치하여 대비하기도 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1896년 1월 영양에서 마을 회의를 열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한 결과, 의병을 먼저 일으킨 안동 지역과 예안(禮安) 지역의 상황을 돌아보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조영기(趙永基)와 함께 이 임무를 맡아 1월 28~29일에 성대(星臺) 권세연(權世淵)이 이끄는 안동의병부대(安東義陣)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이끄는 선성의병부대(宣城義陣, 일명 禮安義陣)를 둘러보고 돌아왔다. 1896년 2월 13일 안동의병부대의 소모(召募) 유시연(柳時淵)이 방문하여 경북 봉화군(奉化郡)에 위치한 청량산(淸凉山)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유시연의 제안에 따라 2월 16일 동생 동현(東鉉)과 재종제 태현(台鉉)을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마을 주민 등 19명을 이끌고 영양을 출발하여 17일 산성을 넘어 청량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켰다. 18일 봉화(奉化)를 거쳐 영천(榮川, 현재 榮州)과 선성(宣城, 현재 禮安)을 경유한 뒤 25일, 안동부(安東府)에 이르러 영호루(暎湖樓) 아래 낙동강 백사장에 머물면서 진법(陣法)을 훈련하였다. 당시 주변에는 창의장 김우창(金禹昌)의 영주의병부대(榮州義陣)와 창의장 권세연에 이은 2대 대장 김도화(金道和)의 안동의병부대가 있었다. 이에 그들에게 군사를 합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안동을 떠나 청송(靑松)·의성(義城)·영덕(盈德)·영해(寧海)·신촌(新村)을 거처 영양 청기로 돌아와 머물렀다. 이때 선성의병부대에서 군사를 합치자는 제안이 들어오자, 선성의병부대와 합진한 뒤 중군장(中軍將)에 올랐다. 선성의병부대의 규모는 약 300명 정도였고, 창의장 이만도에 이어 2대 대장 운포(雲圃) 이중린(李中麟)이 이끌고 있었다. 3월 25일 함창군(咸昌郡) 태봉(胎峯, 현 상주시 함창읍 태봉리)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려고 안동(安東)·호좌(湖左)·풍기(豊基)·순흥(順興)·영천(榮川)·봉화(奉化)·선성(宣城) 7개 읍의 의병진이 예천회맹(禮川會盟)으로 연합 의병부대를 구성하였다. 예천회맹은 7개 읍의 의병부대가 안동 풍산(豊山)에서 도회(都會)를 열고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계획하면서 비롯되었다. 연합 의병부대는 부대별로 집결지인 문경군(聞慶郡) 산양(山陽)에 집결한 뒤, 3월 28일 7개 의병부대 대표가 모여 회맹 의식을 가졌다. 이후 연합 의병부대는 작전 계획에 따라 예천의병부대는 예천 벌현(筏峴)으로, 안동의병부대는 상주 덕통역(德通驛)으로, 호좌의병부대는 함창으로, 김도현이 이끄는 선성의병부대는 영천·순흥 의병부대와 함께 문경 영순면(永順面) 포내리(浦內里)에 머물렀다. 이튿날인 3월 29일 연합 의병부대는 태봉으로 진격하였다. 선성의병부대가 선봉에 서고 풍기·영천·순흥 3진이 뒤를 따랐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시작된 태봉전투에서 연합 의병부대가 모두 패하자, 병사 15~16명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왔다. 산양에 이르렀을 때 남은 병사는 3~4명 뿐이었다. 예천 용궁(龍宮)으로 피했다가 3월 31일 선성으로 돌아오니 모두가 무사하였다. 선성에 도착하자마자 중군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이튿날 4월 1일 안동의병부대가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군사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진격했지만 안동부가 불길에 휩싸여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고 군사를 되돌렸다. 안동부는 일본군이 안동의병부대를 추격하다 안동부 입구 안기동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1,000호나 되는 안동부 전체가 불타버린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선성의병부대 중군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뒤 안동의병부대 도총(都摠) 류난영(柳蘭榮)의 초청이 있었으나 사양하였다. 그러나 진보의병부대(眞寶義陣) 창의장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초청이 있자 ‘어찌 이를 물리치고 나가지 않을 수 있으랴’하고 진보로 갔다. 허훈을 만나 의논한 결과 안동의병부대의 군사 일부를 얻어 오기로 하였다. 1896년 5월 초, 군사 40명을 거느리고 안동의병부대를 찾아가 도총 류난영의 부장(副將)이 되어 안동의병부대 2대 대장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군사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마침 그때 관동창의사(關東倡義士) 민용호가 소모사(召募使) 이호성(李虎成)을 보내 초청하였다. 민용호는 강원도 강릉(江陵)을 중심으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결성하여 이병채·최중봉 등과 함경도 원산(元山)으로 진격하다가 실패한 뒤, 강릉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모집한 군사 60명을 이끌고 강릉으로 올라갔다. 민용호와 부대를 합치고 강릉의병, 곧 관동의병부대의 선봉장(先鋒將) 자리에 올랐다. 며칠 뒤인 1896년 5월 22일 새벽, 서울에서 관군이 공격해왔다. 강릉의병은 대공산성(臺空山城)에서 격전을 펼쳤으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에게 밀려 패하였다. 남은 군사를 이끌고 관동의병부대와 함께 백복령(白伏嶺)을 넘어 삼척(三陟)으로 이동하였다. 5월 31일 서울에서 온 관군이 대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강릉에서 삼척으로 진격해왔다. 관동의병부대와 대장 민용호는 본대와 함께 남산, 중군 최중봉(崔中峯)은 뒷산 매복·대비할 때 선봉장으로서 성 안에서 대비하였다. 새벽에 관군의 공격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작전 초기에는 의병 쪽이 유리한 듯했으나 화력 부족으로 패하자, 남은 병사 10여 명을 이끌고 십이령(十二嶺)과 일월산(日月山)을 넘어 영양으로 돌아왔다. 1896년 6월 소청리 검각산성(劍閣山城)에 본진을 두고 다시 군사를 모으려고 통문을 돌렸다. 동생 동현(東鉉)을 청송 덕천(德川)에 보내 청송의병부대 의병 동참을 촉구하게 하고, 자신도 스스로 여러 곳을 다니며 의병을 모았다. 6월 15일, 검각산성 본진이 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동현과 종제 계현(桂鉉) 등이 항쟁하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소청전투이다. 관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으나 이미 본진이 무너진 뒤였다. 이후 산성을 수리하고 부대조직을 다시 편성하였다. 6월 18일, 일본군이 또 다시 검각산성을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포를 쏘아 격퇴하였다. 6월 22일,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입암(立岩) 근처 사부고개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여기서는 의병 1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를 사부령(思夫嶺)전투라고 한다. 소청전투와 사부령전투에서 패한 뒤, 영양을 비롯한 경북 북부 일대를 두루 돌며 일본군과 관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7월 8일 선성의병부대가 합진을 요청해오자,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함께 영양으로 들어가 영양의병부대 조승기(趙承基)의 대장소에서 머물렀다. 관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선성의병부대 소모장 신공필(申公弼)은 군사 50명을 이끌고 영양 일월 도계(道溪)로 가서 대비하였고, 이때 선성의병부대 선봉장 이원여(李元汝)와 함께 군사 10여 명을 이끌고 지세를 파악하며 대비하였다. 곧 관군 몇 명이 들어오자 동생 동현이 이를 물리쳤다. 김도현 의병부대는 영양군 청기(靑杞), 도곡(道谷), 대항(大巷), 수비(首比), 옥령(玉嶺)을 넘어 다시 울진군(蔚珍郡) 온정(溫井), 평해(平海)로 이동하였다. 평해에서는 군수의 지원을 받았다. 7월 13일, 영해로 진격하였다. 이때 김하락(金河洛)이 영덕에서 일본군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지원하려 했으나 곧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주변 여러 의병부대와 힘을 합하여 영양에 머물고 있는 관군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의병을 해산할 때까지 검각산성을 중심으로 영양·안동·청송·영덕·영해 일대를 돌며 유격전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8월 22일 안동의병부대 선봉장 유시연(柳時淵)을 만나 군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리고 총 113자루를 갈령(葛嶺)으로 옮겨 깊숙이 숨겨 두었다. 9월 5일 예안 부포(浮浦) 서재(書齋)에서 머물 때 선성의병부대 3대 대장 이원여(李元汝, 일명 李仁和)가 사람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그날 선성의병부대 의진소(義陣所)이자 이원여의 집인 온혜(溫惠) 삼백당(三栢堂)에서 밤늦도록 앞날을 의논하였다. 이튿날 9월 6일 관군 40여 명이 의진소를 공격해왔다. 갑작스런 총성에 놀라 급하게 몸은 피했으나 모든 장부와 함께 대장소로 쓰인 삼백당은 붙탔다. 선성의병부대도 9월 20일, 향촌 회의 끝에 해산하였다. 그 뒤 진위대 중대장 김장옥(金長玉)의 해산을 권유하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일월산을 돌아 오록동(烏祿洞)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곳에서 통문(通文)을 써서 경상도 각지에 보내고 며칠을 지낸 뒤 영양 도곡으로 이동하였는데, 관군이 이미 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쌀 7말을 구하여 일월산으로 돌아와 양수정(養壽亭)에서 머물렀다. 여러 의병부대가 모두 해산했으므로 더는 의병을 유지할 수 없어 중양절(重陽節)인 10월 15일 따르던 군사 10여 명을 귀가시키고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1902년에도 영남 지방에 통문을 돌려 “나라가 송두리째 적국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지키려는 의사들이 없음을 통탄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의로서 다시 일어날 것”을 촉구하였다. 1904년에도 비슷한 내용의 통문을 돌렸다. 의병이 해산된 뒤에 각지에서 의병을 빙자한 도적들이 극성을 부렸다. 1903년 9월 21일 김도현은 경북관찰사의 명을 받고 ‘5읍도집강(五邑都執綱)’이 되어 영양, 청송, 진보, 영해, 영덕 지방 각 고을을 돌면서 도적들을 토벌하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 ‘7읍토포사(七邑討捕使)’의 이름으로 도적들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남 지방 유생들과 힘을 모아 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기로 약속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함께 나서기로 했던 유생들이 협조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분을 참지 못해 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낸 뒤 자결을 하려 하였으나 참봉 조병희(趙秉禧)의 만류로 울분을 참고 돌아왔다. 1906년 1월 23일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인근 각지에 통문을 보내고, 영양 장터에도 벽보를 붙여 의병을 일으키도록 촉구하였다. 김도현은 1906년 1월 27일, 오읍도집강 시절에 함께 활동했던 포수 50~60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영양군수 이범철(李範喆)은 대구진위대 안동분견대를 몰래 불러 들였다. 안동분견대 병사들과 일본군이 출동하여 김도현의 소청리 본집을 포위하고, 동생 동현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을 붙잡아 갔다. 이때 다른 곳에 있었으므로 직접적인 피해는 면했으나, 잠시 후 영양군수의 모함으로 일본군에게 붙잡혔으나 안동진위대의 약탈 사건으로 얼마 후 풀려났다. 1906년 4월 8일, 다시 ‘분전장군(奮戰將軍)’ 칙지(勅旨)와 ‘사포의신김도현(賜布衣臣金道鉉)’이라는 비밀 조칙이 내려졌지만, 이를 전달받은 것은 가을 무렵이었다. 김도현은 삼남 지역에 의병을 촉구하는 격문을 돌리며 재기를 꾀하였으나, 1907년 2월 1일 일본군에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1908년 6월 고향 마을에서 조언찬(趙焉瓚)·조인석(趙寅錫) 등과 함께 ‘사립영흥학교(私立英興學校)’를 세워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이것은 ‘국민교육회’와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석농(石農) 조병희(趙秉禧)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또 한 번 자결을 결심했으나 부친이 계셨기에 결행할 수가 없었다. 선성의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자진(自盡)을 위해 음식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문안하였다. 이만도는 단식한 지 24일 만인 10월 10일, 사망하였다. 그의 순국이 직접 영향을 주었다. 1914년 8월 3일 부친이 85세로 세상을 뜨자 자결을 결심하였다.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끝내고, 이튿날인 12월 19일 빈소에 곡을 한 뒤 증손 기팔(奇八)에게 ‘글을 부지런히 읽으라’ 타이르고 집을 나섰다. 12월 21일 울령(鬱嶺) 높은 고개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죽어서라도 일본의 원수를 갚겠다는 시 한 수를 읊었다. 이튿날 새벽 반송정(半松亭) 객주에서 ‘동포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애써 달라’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유서를 남겼다. 그날 석양에 영해(寧海) 관어대(觀魚臺) 아래 대진(大津)에 도착하여 바닷가 높은 바위 산수암(汕水巖)에 올라서 나라 잃은 한을 담은 절명시(絶命詩)를 지어 장손 여래(礪來)에게 주고 큰 소리로 읽게 하였다. 12월 23일(음 11월 7일) 새벽 산수암으로 가서 일출에 맞추어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장손 여래와 친척들이 급히 달려왔으나 멀리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 되자 동짓날 아침 영해 대진에서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로 일본 쪽을 향해 동해 바다로 들어가 자결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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