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용
吳秉鎔1881. 7. 8 ~ 1968. 5.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임실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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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1년 7월 8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대정리(大井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獒樹里)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고종의 장례식과 만세운동을 보고 돌아온 이기송(李起松)과 함께 둔남면 오수리 일대에서 대규모 3·1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이기송·이기우(李起偶)·이윤의(李倫儀)·심상룡(沈尙龍) 등과 함께 오수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기송이 군중 앞에서 독립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장터에 모인 시위대는 약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심상룡·이회열(李會烈)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이기송을 가장 열렬하게 응원하며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이기송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오수경찰관주재소에 갇혔을 때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 내부에 진입하여 이기송을 구출하였다. 이날 이기송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오수주재소를 파괴한 시위대는 다시 둔남면사무소로 들어가 둔남면장 이창의(李昌儀)와 면서기(面書記) 임상학(林相學)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며 폭행을 가하였다. 또한 이들은 둔남면 일대의 일본인 가옥과 상점도 파괴하였다. 같은 날 오후 4시 임실경찰서와 남원헌병분대의 무장 경찰대와 헌병들이 오수장터로 출동하여 총을 쏘아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이튿날 아침에 만세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일제 군경은 시위 주도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시위 주도자로 지목되어 일제 군경에 붙잡힌 후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 해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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