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준
吳錫浚1876. 12. 24 ~ 1951. 8.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양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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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6년 12월 24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청기면(靑杞面) 청기동(靑杞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자(字)는 응홍(應洪), 호(號)는 물와(勿窩)이다. 아버지 오세녕(吳世寧)과 어머니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이만익(李晩翼)의 딸과 혼인하였다. 청기면은 함양오씨 동성마을로 이곳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학자이자 의병장인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스승 이만도가 단식으로 사망하고, 문중의 삼종숙(三從叔) 오재걸(吳在杰)이 만주로 망명한 것을 보고 항일 독립 의식을 품고 있었다. 1919년 3월 24일 청기면 만세운동과 3월 25일 영양읍 장날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류동수(柳東洙)와 함께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이들은 3월 21일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편항(鞭巷)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인물들이다. 임동면 만세운동을 성공으로 이끈 이들은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3월 24일 이강욱·홍명성이 청기면 만세시위로 다음날 있을 영양읍 만세운동에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은 저녁 7시 면사무소로 가서 시위를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지 않자 시위 참여 독려를 부탁받았다. 이에 종질(從姪)이자 청기동 구장(區長)인 오윤승(吳胤承)과 일족들을 동원하여 400여 명의 사람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성사시켰다. 이강욱과 홍명성의 만세 선창에 모여 든 군중도 마을 곳곳을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모두 저녁 10시경에 자진하여 해산하고 다음날 만세운동을 기약하였다. 그리고 주도자들은 입암면(立岩面) 대천동(大泉洞) 이원오(李元五)의 집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고 다음날 만세운동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다. 마을의 유지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영향력이 마을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3월 25일 국상을 당한 선비와 같이 흰 갓(白笠)과 흰 옷(白衣)을 입고 장터로 향하였다. 만세운동을 예상한 일제 경찰들은 영양읍 도로 4곳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또한 외곽에서 헌병 경찰이 검문과 검색으로 사람들이 영양읍 장에 모이는 것을 차단하고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중들은 일제 경찰의 이러한 움직임을 뚫고 영양읍 장터에 모였으며, 주도자들 또한 일제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장터로 잠입하였다. 이렇게 모여든 군중들이 주민과 장꾼들을 합쳐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오후 5시 경 먼저 ‘조선독립만세’라는 큰 깃발을 장터 한복판에 세우고 만세를 선창하였다. 선창에 따라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은 군중을 이끌고 헌병분견소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군중을 진압하여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167명과 함께 붙잡혔다. 167명 중 유일하게 재판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1년 6월이 그대로 유지되어 재차 상고하였다. 그 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시 ‘옥중 시’ 등 총 24편의 시와 4편의 서신이 전하고 있다. 출옥한 이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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