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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구

吳然九

1876. 8. 12 ~ 1953.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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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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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錦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금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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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7)

관련 사건

  • · 금산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7) 1876년 8월 12일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 현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福壽面) 수영리(壽永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김영호(金永浩)·정재철(鄭在轍) 등과 함께 3월 31일에 일어난 복수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금산군에서는 1919년 3월 23일 금산장터에서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래 4월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31일 복수면 주민들은 일제 행정 당국에 의해 동원되어 도로보수공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점심식사 겸 휴식 시간 중이었던 오후 2시경 정재철은 자신이 대전(大田) 장터에서 목격한 만세운동의 상황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도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는 솔선하여 곧바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선창하였다. 뒤이어 김영호와 함께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다른 주민들의 동참을 독려하였다. 유영준(兪英濬)은 미리 준비해 온 종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도로보수공사에 동원된 200여 명의 복수면 주민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도로보수공사의 현장이 만세시위장으로 전환되자, 공사 감독을 위해 파견 나온 일제 헌병들이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중단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김영호 등과 함께 일제 헌병들의 시위 중지 명령을 묵살하고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였다. 이후 인근의 진산면(珍山面) 헌병주재소에서 지원 병력이 파견됨에 따라 만세운동은 일단 해산되었다. 그러나 김영호는 이날 밤 계속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자는 격문을 작성하여 백암리(白岩里) 구장에게 보냈다. 직후 김영호와 함께 낮에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주민들을 독려하여 밤 11시경부터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진산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에 진산면 헌병주재소의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무력 진압함에 따라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호·정재철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파악되어 일제 헌병에 붙잡혔다. 일제 헌병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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