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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일

禹周逸

1887. 6. 30 ~ 1957.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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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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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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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3.19)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7년 6월 3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리(新里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영덕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중순부터 시작되었고 같은 해 4월 4일에 남정면(南亭面) 만세시위를 끝으로 더 이상의 만세시위는 발생하지 않았다. 영덕군에서 시위 계획은 기독교인 김세영(金世榮)·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김세영은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중 서울에 도착하여 만세시위를 접하면서 영덕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귀향한 후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을 만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화의의 내용을 설명하고, 한국도 이 회의에 대표단 2인을 파견하여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이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하였다. 이들은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 북장로교 교회의 정규하와 연락을 취하여 영해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그 해 3월 18일에 일어나서 19일까지 이어진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장날 시위는 19일에 발생한 창수면의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3월 19일에 영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한 10여 명의 시위대는 도중에 창수주재소 부근에서 독자적인 시위를 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영해에 합류하기에 시간에 맞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주변 마을로 가서 시위대를 모았다. 창수면 신기동(新基洞)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협의하여 강제로 토지를 일본에 빼앗긴 주민들을 시위에 합류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위대는 창수경찰관주재소에 이르러 200명을 넘어섰다. 시위대는 커다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변에 “한국이 독립을 한다는데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창수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 “창수주재소를 습격할 테니 같이 가자”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구장 이수각(李壽珏)이 말한 독립운동에 대한 취지를 듣고 찬동하여 3월 19일 창수면 창수동 소재 창수경찰관주재소에 부근 200여 명의 시위대에 합류하여 만세를 불렀다. 기세등등한 시위대는 경찰관주재소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였으며 솔선하여 주재소로 들어갔다. 시위대는 사무실의 객사와 주임순사의 숙소 건물과 공문서를 파괴하고 탁자를 훼손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다. 이때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에 들어가 숙사의 벽을 손으로 부수고, 공문서 및 뜰에 있던 옷가지를 파손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오후 7시에 자진해산하였다. 영해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온 6명 규모의 일본군 1개 분대가 파견되어 검거가 이어졌다. 이후 붙잡혀서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공무집행 방해죄·건조물 손괴기물 손괴죄·공문서 훼기죄·상해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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