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찬기
禹瓚基1861. 9. 26 ~ 1921. 11.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파리장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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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5) 1861년 9월 26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월배면(月背面) 상인리(上仁里,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의 단양 우씨(丹陽禹氏) 양반 가문에서 아버지 우하두(禹夏斗)와 어머니 달성 서씨(達城徐氏)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태유(泰有), 호는 성암(誠菴)이다. 고종 대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던 유학자 서찬규(徐贊奎)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유림들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독립청원서」, 세칭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의 1차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서울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한 만세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어 갔다. 이때 한국의 독립선언 및 만세운동의 정신과 원칙을 밝힌 독립선언서의 작성 주체로서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에 유림의 인사는 1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교통과 통신의 한계에서 유림에 제대로 연락이 닿지 않아 발생한 문제였으나, 지난 500년 조선사회를 정치 사상적 뒷받침한 것은 물론 일상생활의 규범으로 작용한 유교의 인사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유림들에게는 매우 부끄럽고, 통분할 사안이었다. 유림은 한국 독립의 간절한 의지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기로 결의하고, 총 2,674자의 한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일본의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직접 파견하여 이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여건 상 김창숙은 파리로 직접 가지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청원운동의 주도 세력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이었다. 영남지역에서는 곽종석의 학맥을 중심으로 독립청원운동이 전파되었다. 독립청원운동의 내용과 「독립청원서」를 전달 받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사촌 동생인 우승기(禹升基),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석하(曺錫河)·권상문(權相文)·우경동(禹涇東)·우하교(禹夏敎) 등과 함께 유림의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런데 경북 상주(尙州)에서 「독립청원서」에 유림 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하고, 직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송회근(宋晦根)이 1919년 4월 12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유림의 독립청원운동, 즉 「파리장서」사건이 발각되었다. 이에 곽종석 등 다른 서명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나, 조선총독부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유림들이 연루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최대한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하였다. 그 결과 곽종석, 김복한 등을 제외한 다른 일반 서명자들과 함께 미결수로 일제의 감옥에서 수개월 간 옥고를 치른 뒤, 같은 해 8월 9일 불기소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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