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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세

吳祘世

1907 ~ 1932.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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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오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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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단천(端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단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전간도조선인단체
  • · 조선공산당재건설정리위원회
  • · 고려공산청년회
  • · 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
  • · 조선공산당재건공작위원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6)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이중면(利中面) 하전리(荷田里) 출신이다. 1932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 사망 기사에 따르면 당시 26세로 1907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오성세(吳省世)이며 아버지 오주혁(吳周爀)은 만주와 노령 지역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투쟁에 뛰어든 인물이다. 1925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의 영신중학교(永新中學敎)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또 간도 지방에서 민족학교를 세우고, 『붉은 주먹』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배포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12월 17일 전간도조선인단체(全間島朝鮮人團體)가 간도 시민대회를 위한 긴급대회를 노동학원 강당에서 개최하였을 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1929년 3월, 1928년 12월 7일 코민테른에서 발표한 ‘조선공산당 재건문제에 대한 지령[12월 테제]’에 따라 윤자영(尹滋英)·김영만(金榮萬) 등과 함께 만주 둔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종래의 분파투쟁을 근절하고 노동자 · 농민을 기초로 당을 재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어 1929년 10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의 만주부(滿洲部)가 조직되자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만주부 책임자를 맡아 동지 규합과 혁명적 항일운동에 힘썼다. 1930년 10월경,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을 목적으로 국내로 들어와 11월 26일 ‘조선공산당 재건설정리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부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일제가 이를 탄압하자, 동지들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이후 1931년 3월, ‘아래’로부터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민중의 역량을 집결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소하고, ‘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직준비회’를 결성하였으며, 쟁의부(爭議部)의 책임을 맡았다. 동지 윤자영은 정치부 책임자를 맡았다. 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며 민중들의 의식을 개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데 전념하였다. 그 해 4월 30일을 기해 서울에서 공장이나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집결하는 장소에 격문을 뿌려 노동절 시위를 일으키는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책임비서를 맡아 격문 700장을 동지들에게 배부하여 선전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31년 4월 22일, 용산경찰서에서 신철(辛鐵)·정종명(鄭鍾鳴)·신경애(申敬愛)·이적효(李赤曉) 등을 붙잡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격문 살포 계획이 밝혀지고 이때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경찰의 수배를 당하였다. 그 해 5월 3일에 의정부 방면으로 피신했으나, 일제 경찰이 해당 정보를 입수하고 총을 휴대한 무장경관대를 현장으로 출동시키는 바람에 추격을 당하였다. 이후 소요산과 함흥 방면으로 피신 다니면서 추격을 받다가 결국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조사를 받으며 옥고를 치르던 중 극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1932년 11월 8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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