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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미상 ~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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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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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노령방면

관련 단체

  • · 상해파 고려공산당
  • · 적기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 · 국민대표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와 출신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엄윤(嚴崙)을 사용하였다. 1921년 고려공산당 대회와 전한군사대회 소집 문제를 둘러싸고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의 전로한인공산당과 치타(Чита)의 원동국 한인부 사이에 알력이 첨예화하면서 양측이 충돌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져갔다. 이를 막기 위해 당의 통일을 갈망하는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힘입어 1921년 2월 말경 치타에서 ‘특별당원회’가 소집되었다. 특별당원회 참석자들은 분쟁 중인 양측의 조화를 도모하기 위해 이르쿠츠크의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에 중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김하석(金河錫)·최고려(崔高麗)·최성우(崔聖禹) 등과 함께 중재단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는 특별당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중재단 파견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여기에 더해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비서 슈먀츠키(В.З.Шумяцкий)는 3월 29일 원동비서부와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의 결정에 복종하지 않는 치타 원동국 한인부 간부들을 당에서 제명하고, 원동국 한인부 자체도 해산시켰다.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슈먀츠키는 원동국 한인부 간부들을 ‘반혁명’ 혐의로 체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해 4월 말경 박애(朴愛)·김진(金震)·계봉우(桂奉瑀)·장도정(張道定)이 체포되어 이르쿠츠크 감옥에 수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1921년 11월과 1922년 4월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한국위원회의 결정서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양 세력의 연합을 촉구하였다. 이에 양 파는 임시연합간부를 선정하여 당 통합대회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시베리아 한복판인 베르흐네우딘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에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가 열렸다. 이때 대회에 의결권을 가진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대표자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었고, 소수파의 위치로 전락한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장에서 물러남으로써 대회는 결렬되고 말았다. 베르흐네우딘스크대회가 끝난 뒤 참가대표들은 곧바로 상하이(上海)로 파견되어 1923년 1월에 개최되는 국민대표회의 참가하였다. 러시아 자바이칼주 대표 자격을 얻고자 1923년 1월 15일 치타한인회의 간부 박성도(朴成道)와 서기 박윤해(朴允海)가 발급한 신임장을 국민대표회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이미 1월 9일에 태용서(太龍瑞)가 자바이칼주 대표로 자격을 인정받은 후였기에 자격심사 문제로 논쟁이 시작되었다. 1월 16일 회의에서 태용서의 자격이 정권되고 특별심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선출된 특별심사위원 안창호(安昌浩)·송병조(宋秉祚)·배천택(裵天澤)·이상호(李相浩)·이진산(李震山) 등은 1월 20일에 “두 대표는 다 대표될 자격이 있고 또 대표로 파송된 사실이 확실함”이라고 보고하여 두 대표를 모두 인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본회의에서는 대표위임 수속상 착오와 공문상 모순이 있기 때문에 파견 지방의 명확한 지정을 기다려 처리하기로 표결 처리되었다. 결국 1월 29일 치타한인회에서 태용서는 확실한 대표라는 답전이 도착하였기에 대표 자격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다만 대표 건은 보류되어 질의한 후 다시 토론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이후 대표 자격을 결국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후 러시아로 돌아와 적기단(赤旗團)에 가담하였다. 적기단은 1923년 1월 10일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신한촌 백산학교 2층에서 열린 한인청년회의에서 결성되었다. 회의에는 46명의 청년들이 참가했으며, 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위원 이젤손도 참석하였다. 이젤손·최계립(崔溪立)·김 아파나시·최동욱(崔東旭)·홍파(洪波)·전창순(全昌順) 등이 임시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회의는 적기단 조직총회로 선언되었다. 적기단은 남만주·북만주·동만주 등 3개 지대에 사령부를 설치하여 일본제국주의 군벌과 투쟁하되 필요한 경우에는 파괴와 암살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단장은 최계립으로 동만사령부장을 겸임해 영고탑(寧古塔)을 중심으로 적기단 지부들을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 농촌에 설립하고, 국내에도 적기단 지회를 조직하고 대대적으로 반일애국사업을 시작하였다. 적기단은 기관지로 『벼락』을 발행했으며 주필은 박우(朴牛)였다. 1924년 5월 하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단장 최계립과 이동휘(李東輝)·김일수(金一洙)·박응칠(朴應七) 등이 참석한 적기단 간부회의에 블라디보스토크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5년 4월경까지 중국 둥녕현(東寧縣)에서 적기단 단원으로 원동청년공산당과 연락하고 있었다. 이후 행적은 확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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